이 땅에서 팔십 년을 버틴 삶이 진저리치게 외롭다
-돈의동 103번지 결연장례지원증서전달식에 부쳐
영결식은 2시부터 엄수라 했다.
1시 30분쯤 서울대병원에서 운구차가 출발한 모양이다. 필운동 서울조합사무실을 나와 경복궁역 근처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뀐 뒤에 광화문을 겨우 지났다. 광화문을 나오는 사이 영구차가 마포대교를 건넌다는 뉴스를 들었다. 영구차는 여의도에서 영결식을 갖고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동할 것이다. 자칫하면 내내 교통통제구간을 따라갈 수도 있는 일이라 인사동을 지나 낙원상가 아래를 다시 지났다. 한 시간 전 머물렀던 곳이다. 눈발이 흩날렸다. 조금씩 더 많이 내렸다. 탑골공원과 파고다학원을 지나 을지로로 들어섰다. 청계천을 끼고 일방통행도로가 이어져 신호등으로 끊어지는 구간이 짧다. 신호등 너머 뿌연 하늘에 남산타워가 보였고 횡단보도 앞에 멈출 때마다 접은 종이상자를 잔뜩 실은 리어카가 지나갔다.
갑자기 차선을 바꾸는 다마스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데 황색신호가 켜졌다. 숨을 고르자 붉은 등이 들어왔다. 붉은 신호등 아래로 다마스보다 커다란 종이짐을 실은 리어카가 또 한 대 지나갔다. 눈발이 촘촘해졌다. 리어카위의 박스는 젖을 것이다. Kg으로 계산을 할 텐데 젖은 박스는 어떻게 무게를 달까. 리어카는 사람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몇 대의 리어카와 헤어진 후에야 수레를 끌고 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날씨는 갑자기 차가워졌고, 곱지 않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하루 종일 서울시내엔 간간히 교통통제가 있다.
교통상황 때문에 계속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영결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온 몸으로 민주화를 이룩해 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운구차는 호위를 받으며 커다란 길의 교통을 통제하고 거침없이 달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권력자도 그러했듯이 변절을 했거나 배신을 했거나 권력자로 마감하면 그 뿐이다. 권력자의 장례는 국가가 치르고 국민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당연한 듯 그들을 애도한다.
당연히 받을만한 일이 존재하는가.
몇 년 전, 사진 한 장 제대로 갖지 못한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 드리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지인은 나를 말렸다. 그런 꿈을 갖지 말라 일렀다. 슬픈 일에 가까이 가지 말라 말했다. 지역의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자서전쓰기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었다. 담당자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 수업을 신청했느냐 물었다. 시간만 채워주시면 된다는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모두들 무심해보였다. 영정사진 찍는 행사를 말한 적 있다. 그런 건 많이들 한다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몇 년을 묵힌 일. 오늘에서야 비로소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을 통해 무의탁 독거노인이며 기초생활수급자인 분들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찍기 싫지만 그래도 찍어야겠다고 한 분의 표정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관속에 동전 세 닢과 박카스를 꼭 넣어달라던 어르신은 옷을 한 벌 더 챙겨오셨다. 허름한 스카프를 고쳐 매어 풍성해보이도록 다듬어드렸다. 옷을 바꿔 입고 사진을 찍으며 내내 환하게 웃었다. “영정사진이잖아. 영정 사진 많아.” 씁쓸하게 입을 다시기에 나는 뺀질하게 웃으며 장수사진이라 고쳐 말했다.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 연고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먹이던 어르신의 마른 손이 뜨거웠다. 이 땅에서 팔십년을 버틴 한 사람의 삶이 진저리치게 외롭다.
오늘 결연장례를 맺은 분들 중 유일하게 “어르신”이라 칭하지 않은 분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 다른 일은 못하고 야간에 재활용품을 수거해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다. 리어카가 지나갈 때 그 사람을 떠올렸다. 80년대에 서울 어느 대학가에서 사진관을 했었다는 그는 카메라를 보면 가슴이 뛴다 했다. 사진관에서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의 증명사진을 찍으며 셔터를 눌렀을 장면을 상상했다.
자기 사람을 위해, 자기 인생을 위해, 자신의 밥 한 그릇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는 인생도 있나. 사기를 치고 구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몸을 팔아도, 타인의 밥벌이에 기생하며 남의 등 처먹고 사는 인간도 그 자신으로써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거나,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 때, 세계는 점점 좁아져 북극바다에 녹아가는 얼음판만 한 세상 위에서 오들오들 떨며 버티는 것이다. 눈이 퍼붓고 군사독재에 항거했고 결국 권력자로 기억될 한 사람이 떠난 날, 나는 텅 빈 빈소조차 갖지 못할 뻔 한 사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의례적인 행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사무국장의 느린 말씨가 머릿속에서 출렁거렸다. 꼭 다시 오라고, 할 말이 많다고, 나 죽는 날 꼭 같이 와야 한다고 거듭 큰소리로 강조하는 그 사람이 살던 골목의 작은 문을 기억한다. 카메라를 쥐고 들어선 골목은 갈 때마다 온갖 사람의 형상이 쏜살같이 출몰했다 사라졌다. 숭고하거나 천박하거나 적막하거나 시끄럽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눈부신 여름 햇살과 발가락이 미워지는 겨울바람이, 굴러 떨어지기 딱 좋은 좁아터진 계단과 앉아야 할지 서야할지 알 수 없는 작은 방의 답답한 창문을 가리는 전선과 하수구를 타고 수십 년의 걸음과 수백 년의 사연이 얼기설기 뒤엉켜 부유물이 가득한 강물처럼 떠돌았다. 귀신을 본 듯, 꿈인지 생시인지 아득하기만 했다.
알량하게도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어떤 핑계를 찾아서라도 오랫동안 울고 싶었다. 간간히 햇빛이 드나들던 하늘이 어둑해진다. 내가 말을 하는 모든 이유는 누군가와 따뜻하게 마주보며 웃고 싶어서다. 세상 모든 불행도 그러하리라. 그 어떤 불행도, “처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멀리 하늘이 뿌옇다. 애도가 간절하다. 글/ 이하나 사진기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