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조합> 조합원 기억노트: 나를 쓰고 당신을 쓰다
지난 10월 15일부터 기억노트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아래 글은 강좌에 참여한 김은자 조합원이 쓴 기억노트 중 일부입니다.
막내에서 막이로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엄마의 치매 행동은 점점 더 이상했다. 못 걷겠다고 하시면서도 병원 진료를 거부했고,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는 거실을 걸어 다니고 세수도 하신 눈치였다. 나는 엄마의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했는데, 의사는 엄마를 입원시키라고 권했다. 많이 불안하고 아버지의 상황이 두렵고 이젠 지쳐서 쉬고 싶은 심정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병원 두 군데를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결국 아버지가 어느 정도 회복하셔서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자 같은 병원에 엄마도 모셨다. 엄마를 시설로 모실 결정을 내릴 당시에는 내가 돌보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컸으나 나중에 돌아보니 그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치매 전문 의사가 있는 병원을 거쳐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렇게 엄마가 시설에 계신 지 이제 만 6년이 되었다.
최근에 내가 요양원을 방문한 어느 날, 엄마는 멀리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텔레비전에는 엄마와 어린 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난 딸 있으면 죽일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물었다.
“왜?”
“젖이 말라 붙었잖아.”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 말이었구나.
“지금은 엄마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지. 옛날에 나 엄마 젖 많이 먹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외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젖을 떼려고 나를 외가에 보냈다. 그런데 우유를 전혀 넘기지 않는 나를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결국 이웃의 산모한테 나를 안고 가 젖 동냥을 했다고 들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엄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딱 한 번 길게 하셨다. 외가는 김해에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무척 부지런하고 강한 분이었다. 열심히 일해 일가 친척을 도우셨고 종손 집을 일으켰다. 정작 당신 집은 뒷전이었던 것 같다. 마을에서 농사 지은 곡식이 잘 팔리지 않자 외할머니는 큰 트럭을 빌리고 운전할 사람을 구했다. 그 트럭에 마을 곡식을 싣고 부산의 큰 시장으로 가 다 팔고 돌아오셨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체격이 아담했지만 여장부 같은 분이었던 것 같다. 꾸미셨다면 고왔을 테지만 외할머니의 얼굴은 늘 검게 타 있었다. 외할머니의 그 피는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물론 우리 남매와 외가 친척 중에서 그런 강하고 대담한 기질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는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살 위인 언니와 7살 위인 오빠가 있었다. 엄마는 자식을 둘만 낳고 안 낳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낳았다고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예민했다. 엄마가 나를 안고 잠재워 바닥에 내려 놓으면 내가 작은 기척에도 어느새 깨어 울었다고 한다. 바닥에 오래 누워있질 않으니 내가 미워서 엄마는 내게 베개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 뒤통수가 납작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나는 어린 시절 기억이 많지 않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다들 그때 어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난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망각에 빠진 것 같다. 그래도 사진첩을 펼치면 꽤 많은 사진이 있다. 거의 모두 언니가 찍어준 사진이다. 사진 속 내가 웃고 있다. 그때 행복했나 보다고 위로를 받는다. 언니에 대한 기억 하나는 언니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갔을 때 언니가 보고 싶어 이불 위로 몸을 던지며 울었다는 사실이다. 내게 언니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언니 덕분에 공부도 쉽게 했다. 공부하다가 물어보면 언니는 뭐든지 잘 가르쳐 줬다.
대학 때 교수님께서 부친상을 당하셨다. 우리 학생들 몇 명이 교수님 댁에 가서 문상객 접대를 도와드렸다. 그때 내가 놀란 일이 둘 있었다. 처음엔 사모님께서 상을 닦으라고 건네는 행주가 너무 따뜻해서 놀랐다. 겨울이었는데 말이다. 엄마가 내게 건네는 행주는 늘 차가웠다. 찬물에 손 담그고 일하시는 엄마가 힘드시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찡했다. 사모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이고, 남의 집 귀한 아들들한테 일 시켜서 어쩌나.”
여학생들에게는 이런 저런 일을 쉽게 시키시는 것 같아서 난 좀 속이 상했다. 내 기억에 우리 집에서는 외아들인 오빠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일이 없었다. 아들이나 딸이나 다 평등한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자랐다. 나는 그때 부모님께 감사했다.
부모님은 우리를 크게 야단치는 일이 없었지만 내 기억에 딱 한 번 아버지가 오빠를 때린 일이 있었다. 부모님도 언니도 나도 착실한 성격에 말수가 적었던 반면에 오빠는 너스레도 잘 떨고 우리를 자주 웃겼으며, 고등학교 때 잡지를 보고 정성으로 꾸민 엽서를 라디오 방송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한테 걸려 혼이 났다. 여름이었던지 오빠는 런닝 셔츠 바람이었는데 입고 있던 옷을 아버지가 찢었다. 성적이 떨어져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언니는 부산의 국립대 약대를 가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장 노릇을 했고, 오빠는 후기 대학으로 서울에 있는 사립대를 가 언니보다 몇 배 많은 등록금을 받아 갔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오빠는 부산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언니는 4년째 약사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삼 남매는 2월에 통도사로 소풍을 갔다. 누런 수풀 사이에서 보온병의 커피를 마셨고 껄껄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3월에는 시내의 경양식집으로 외식을 나갔다. 당시엔 함박 스테이크가 귀한 음식이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은 이렇게 맛있는 걸 먹자고 다짐했는데 그날 외식이 셋이 나눈 마지막 외식이었다.
그 해 6월 어느 날 오후. 토요일이어서 나는 집에 있었다. 화창한 날이었고 거실에서 바라보는 현관은 눈부시도록 밝았다. 전화벨이 울리자 내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가 어디에 놓여 있었길래 그 현관의 모습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선명한지 모르겠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말했다.
“저기, 학생이 죽었어요.”
나는 무슨 일인지 파악을 못한 상태에서 전화를 누군가 어른에게 넘겼다. 교수와 답사를 나갔던 오빠가 강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급히 사고 장소로 떠났고 다음날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에 가겠다는 나를 이모가 말리면서 그래야 오빠가 마음속에라도 살아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지나고 생각하면 그 판단은 잘못이었다. 그 장례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애도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한순간에 나는 오빠와 단절되고 말았다. 언니가 장례식에 갔는지, 또 내가 이틀을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장례 다음날도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갔다. 교복을 입고 현관에 놓인 구두를 신었다. 깨끗이 닦인 까만 구두였다. 평소에 늘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그날 아침 일찍 닦아 놓으신 것이었다. 그 반짝이던 구두를 나는 기억한다.
그날 이후 우리집은 적막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엄마가 누워있는 안방에는 외삼촌, 외숙모, 언니 친구, 친한 이웃이 와 있을 때가 많았다. 엄마는 큰소리로 울지도 못했다. 나지막이 한숨 지으며 하신 이 말만 기억한다.
“우리 아들 키가 크잖아. 데리고 올라오는데 발이 관 밖으로 나와 있더라. 그게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지한테 맞는 관도 못 구해주고.”
또 언니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젠 ‘계란 후라이’ 못 먹을 것 같아.“
나도 며칠 전의 아침 식사를 기억했다. 오빠는 자기 몫의 계란을 먹고는 하나 더 부쳐 달라고 했는데 언니가 귀찮아했다. 하나 먹었으면 되었지 뭘 더 먹으려고 하냐고.
암울한 시간을 지나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그 해 11월 어느 날.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밤늦게 자취방으로 올라가는데 골목 입구에 삼촌이 서 계셨다. 뜻밖의 방문이었다. 방으로 들어오신 삼촌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바로 말씀하셨다.
“네 언니가 죽었다.”
그때 삼촌의 억양과 톤은 지금도 귀에 생생한 것 같다. 출근 길에 탄 택시가 사고를 당했고, 몇 주 전에 이미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이번에도 나는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언니는 내 사진첩에 있었지만 언니가 떠났음을 실감할 길이 없었다. 받아들이기 힘들고 억울한 심정을 콘크리트 바닥 아래 묻고 지내는 듯이 살았다. 그때부터 내겐 짐이 하나 생겼다. 누구도 내게 지우지 않았으나 혼자서 부담으로 느낀 짐이었다.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부모님께 정말 잘 할 텐데, 막내인 내가 어떻게 부모님을 책임 지지? 내내 그 짐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다.
“30년 가까이 지고 있던 짐을 이제 내려 놓으려고 해요.”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 안정을 좀 찾으셨을 즈음, 내가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었다. 그 짐은 막내로 태어나 맏이 흉내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짊어진 것이었다.
글/ 김은자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