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시대 공동체 장례의 미래
출처:tvn공동체 장례문화의 붕괴
티브이엔의 ‘응답하라 1988’은 쌍팔년도(1988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을 배경으로 한 유쾌하고 가슴 짠한 가족극이다. 얼마 전 방영된 편에는 전라도 어느 시골마을의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할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도착한 시골집 대문을 연 주인공(성덕선)은 생전 보지 못한 풍경과 마주한다. 흐릿한 전구가 불을 밝힌 한옥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채 왁자지껄 술잔을 기울이는 어른들. 아낙네들은 가마솥 뚜껑에 전을 붙이며 음식을 나르느라 바쁘고, 물색 모르는 아이들은 괜히 신이 나서 여기저기 뛰어 다닌다.
술을 마셔 불콰해진 아버지는 덕선과 보라, 노을 삼남매를 술자리에 불러 앉히고 친척들에게 소개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왜 아버지는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슬퍼하지 않는가. 왜 친척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는가. 어머니는 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가. 좁은 방에서 사촌들과 누워 칼잠을 자면서도 덕선의 머릿속에는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빈소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아버지는 외국에서 막 도착한 형을 껴안고 오열한다. “우리 형 불쌍해서 어쩔거나. 엄니 얼굴도 못보고…. 머가 그리 바빠서 빨리 갔소. 엄니 보고 싶소, 보고 싶어 미치겄소.” 이때서야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형제와 친척들이 서로 얼싸안고 통곡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덕선과 아이들은 알았다. 어른들은 슬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견디고 참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지금은 이런 장례식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그랬다. 30, 40대 정도만 해도 이런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신나게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에 들어섰는데 아주 낯선 풍경과 마주한 경험. 뭔가 엄숙하고 기이하며 약간은 당황스럽고 무서웠던 그 분위기.
어느 집 대문에 ‘謹弔(근조)’라 쓰인 노란 조등이 은은히 불을 밝히고, 작은 마당엔 이웃 사람들이 웅성웅성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거친 삼베로 만든 굴건제복을 입은 상주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문상객을 맞이하고 맞절을 한다. 향과 초는 마루에 차려진 제단에서 타오르고.
어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을장례 풍경이다. 어느 골목 귀퉁이에는 장의사가 있었고, ‘염쟁이’라 불리는 아저씨가 있었다. 초상이 나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 아저씨를 찾았다. 마을장례는, 심지어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서도 치렀다. 초상이 나면 아파트 주차장에 차일을 치고 문상객을 받았다.
이러한 공동체 장례문화는 불과 20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삶을 마치고 고인의 숨결이 남아 있는 바로 그 방에서 가족과 친지가 함께 모여 조용히 고인을 기리던 문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극단의 서구 근대 산업화만을 추구한 결과 시장경제, 상품경제 속에서 사람을 오직 이윤을 낳아주는 노동력으로만 보는 경제제도, 그래서 늙고 병들면 쓸모없어진 낡은 부품처럼 폐기물로 처리되는 삭막한 풍조가 고스란히 장례식의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의 주인인 세상 이전에 죽은 조상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식의 죽은 자가 아니었다. 죽었으되 죽은 자라로 할 수 없었던 존재였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고, 조상숭배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전제로 했다. 자신의 생명은 혈연으로 연결된 조상과 자식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서구 과학기술주의와 함께 고인의 시신은 그저 처리해야 할 골칫덩어리의 물질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상숭배란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 과거의 미신이자 낡은 비과학의 신앙으로 치부되고 만 것이다.
죽음과 주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시장경제가 진리처럼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의 장례문화는 극단적으로 상품화해 버린다. 압축성장과 함께 압축상업화가 장례문화를 단기간에 압축 변형시킨 것이다. 공원묘지도, 화장장 납골당도, 장례식장도, 음식도, 염습서비스도, 수의 관 같은 장사물품도 모두 이윤을 위한 장사판이 된 것이다.
장례문화의 상업화는 급기야 장례사업을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신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죽음의 장사’로 변질시켰다. 다단계 불법영업이 횡행하고, 어떻게 하든지 상주들로부터 추가 비용을 지불하게끔 만드는 교묘한 사기영업도 고착화되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상주와 가족은 끝나는 순간까지 아주 불쾌한 장례식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 참담한 현실이다.
공제조합과 두레, 협동조합
공제조합이란 생활상의 각종 어려움을 조합원의 상호부조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결사체 조직(association)을 말한다. 공제(共濟)의 한자말을 해석하면 함께 공(共), 구제할 제(濟), 즉 더불어 구제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조상들의 두레와 계 등과 같은 것이다.
20세기 초, 조선이 망한 뒤 우리가 추구한 가치는 전통 농업사회의 유산은 모조리 땅 속에 묻어버리고, 철저하게 서구 근대화 산업화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사상과 문화, 전통 농업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문물은 낡고 창피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여기며 폐기해 버렸다. 그 자리를 서양 문물과 문화가 대신했다. 두레나 계도 그렇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서구의 공제조합과 협동조합이 들어오게 되었다. 공제조합은 서구 근대화, 산업화의 산물로서 서양의 ‘benefit society’, ‘mutual aid society’ 등을 번역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사회, 개인, 국가, 민족, 철학, 사상, 형이상학, 학문 등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어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과 중국보다 먼저 서구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에서 만든 한자 번역어이다. 협동조합도 공제조합도 일본이 만든 조어이다.
서구의 공제조합은 역사가 고대 로마의 콜레기아(collegia, 예컨대 우리나라의 상포계와 같은 모임으로 가난한 로마 시민들의 장례 공제조합인 콜레기아 테누이오룸collegia tenuiorum)나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도시 코뮨과 촌락 코뮨에는 자유인의 길드 조직과 함께 다양한 공제조직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인들의 연대체인 중세의 도시공동체와 촌락공동체는 근대 국가의 출현과 함께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근대 국가란 도시와 농촌의 자치공동체와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산업혁명과 탄생한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이전의 세상과는 전혀 체제였다. 동시에 역사상 전혀 색다른 새로운 계급인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탄생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노예보다도 못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10살 이하의 어린애가 탄광 속에서 하루 18시간 이상의 노동을 강요당했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기계 부속품처럼 혹사당하다가 곧 폐품으로 버려졌다.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채 30살이 되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했다. 서로 뭉쳐 상부상조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노동자들은 해체된 길드와 각종 공제조직들을 현실에 맞게 다시 복원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 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친목모임과 공제조직이 있었다. 우애조합(friendly society), 형제조합(fraternal organization), 오드펠로(oddfellow), 상호부조조합(mutual aid society), 신용조합(credit union), 노동조합(trade union), 통신협회(corresponding society), 자조그룹(self-help group) 등이 그것이다.
이들 노동자 조직은 국가의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았다. 영국은 1799년 그 유명한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모임과 파업 집회 시위 등을 원천 금지시켰다. 노동자들이 모임을 만들면 곧바로 구속되거나 기소되었다. 노동자들의 집회와 파업에 대해서는 즉각 총칼을 동원해 학살하고 해산시켰다. 노동자들의 모임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모임의 명칭은 비밀 통신협회, 비밀 우애조합 같이 앞에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결사체를 뜻하는 영어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에는 이처럼 국가로부터의 독립과 자립 자치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오늘날 협동조합운동의 제4원칙인 ‘자율과 독립’에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자립, 자치운동이라는 서구 노동자 조직운동의 역사에가 담겨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질병, 부상, 화재, 장례, 혼인, 출산 등 이러저러한 애경사에 부닥치게 되고, 이를 혼자서 치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공제조합을 조직, 일정액의 조합비나 곗돈을 모아두었다가 애경사나 기타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쓴다면 훨씬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다.
보험은 애초에는 이런 공제조직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자본주의 보험 상품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목적 아래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의 보험은 철저히 영리의 관점에서 운영되고 있다. 공동체 속에서 상호부조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가장 가깝고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공제조합과는 근본에서부터 다르다.
공제조합과 협동조합은 자유인들의 결사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사업체임에 견주어 공제조합은 특별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이를 해결하는 상호부조 조직이라는 점이 다르다. 공제조합은 한꺼번에 많은 재화와 일손이 필요할 때 이웃 주민과 동료 간의 연대와 연합의 힘, 결사체의 성격이 더 강하다.
서구 유럽의 공제조합은 나라별로 그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른 유형으로 발생하고 변화해 왔다. 영국에서는 1719년 뉴캐슬 제화공 공제조합이 최초로 조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 영국에는 무려 7천200여개의 공제조합과 우애조합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 약 2천여개의 공제조합과 조합원 10만여명이 조직돼 있었고, 19세기 말에 약 1만3천 개의 공제조합과 210만여명의 조합원으로 급증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공제조합의 조합원 수는 20세기 초에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18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자본주의 산업 국가 체제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똑같이 경쟁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내면화시키면서 적응하고 있었다. 오직 이윤과 돈을 신으로 숭배하며 극단의 물신주의로 치닫던 노동자들이 생각을 바꾼 것이다. 경쟁 지상주의를 벗어나 상호부조와 협동의 기치를 다시금 높이 쳐든 것이다. 서구의 협동조합과 공제조합, 우애조합 운동은 이처럼 코뮨과 길드의 후손이자 자유인들의 연대 운동의 재생이었다.
우리나라 공제운동
오랫동안 한국의 농민들은 두레라는 강력한 농업공동체를 조직해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 왔다. 그리고 서로 상호부조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한국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서구의 꼬뮨과 유사한 두레, 계, 보(寶), 도(徒), 접(接), 모꼬지 등 다양한 이름 아래 공동체 조직이 존재해 왔다. 촌회, 향회, 촌계, 동계는 한국이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자치공동체로서 면면히 그 기능을 이어왔다. 공동체가 남김없이 해체되고 만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명맥이 남아 있는 곳이 더러 있을 정도이다.
전통 농업사회는 공동체 노동이 없으면 유지가 불가능한 지역공동체 사회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내내 소작권은 영소작권(永小作權)이라고 불릴 정도로 양반지주라고 함부로 소작권을 옮기지 못했다. 소작료도 3~4할이 보통이었다. 양반 지주의 농사일을 거부할 수도 있는 두레라는 막강한 공동체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극심한 천재지변이나 관리들의 탐학, 전쟁이나 민란과 같은 격변기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조선시대 마을에서는 굶어죽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두레 공동체의 단위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의 리와 동이다.
두레 공동체와 함께 마을공동체에는 공제와 친목을 겸한 각종의 계(契)가 있었다. 씨족끼리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직한 종계(宗契), 혼인과 상을 치르기 위한 혼상계(婚喪契), 상포계(喪布契), 상여계(喪輿契), 경제적 곤란을 타개하기 위한 호포계(戶布契), 농기구 마련을 위한 농구계(農具契), 같은 나이 친구들끼리 서로 돕는 갑계(甲契) 등이 존재했다.
한국의 공제조합운동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한국에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이식된 것은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이후였다. 한국에서 이른바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공제 조직이 처음 조직된 것은 1903년 6월 20일 서울에서 설립된 공제회가 최초이다.
1876년 2월 조선이 일본과 강제로 맺은 강화도 통상조약은 일본이 조선에서 누릴 특권만 명문화하고 조선이 주권을 포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없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화폐의 유통, 일본인 범죄에 대한 영사재판권의 허용 등을 담고 있었다. 조선은 이후 이같은 무관세권 허용으로 말미암아 급속하게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값싼 상품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일본은 한전시세(韓錢市勢)라는 화폐조작을 통해 조선화폐제도의 붕괴를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 화폐인 백동전과 상평통보를 대신하는 일본 제일은행권, 그 중에서도 종이 어음의 농간은 쉽게 말해 오늘날의 환투기와 똑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동순태(同順泰)라는 청나라 장사치는 동순태상표(商票)라는 종이 쪼가리 어음을 발행하여 백가지 재화를 농락했다고 매천 황현이 울분을 토하며 기록할 정도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능한 조선 정부와는 별도로 민간에서 스스로 나서서 이같은 제일은행권과 동순태상표의 이용을 배격하고 조선인들이 뭉쳐 서로 도와 조선 화폐를 사용해서 조선경제를 지키고자 하는 공제회 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한국의 공제조합운동은 일본을 통해 서구 문화와 문명이 소개되면서자연스럽게 일반 인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우리에게도 서구의 코뮨과 같은 지역 자치공동체, 노동공동체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공제조합 조직은 그 숫자도 많고 역사도 오래 되었다. 수협공제는 1937년부터, 농협공제는 1961년, 신협공제는 1987년, 새마을금고공제는 1991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1948년부터 시작된 교육시설재난공제, 1963년부터 시작된 건설공제 등 조합 공제의 역사도 긴 편이다. 그러나 이들 공제 조직들은 민간 스스로 만든 자립 자치의 공제조직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인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법률에 따라 만든 관제조직에 가깝다.
주로 대학에 설립돼 있는 의료공제 조직들도 학생들과 교직원에 대한 복지 차원의 공제로서 공제회비를 대학등록금과 함께 걷기 때문에 존재조차 제대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많은 기업체와 단체들에 조직된 상조회 또한 상조회 혜택의 범위도 그리 크지 않고, 그저 기업과 단체에 소속된 부속기관 같은, 일종의 사내 복지 차원의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60년 가톨릭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인민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한 한국의 신협운동은 민간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였다. 신협운동은 조합원의 강한 유대를 최우선으로 삼은 협동조합 결사체운동과 사업체운동의 모범사례였다. 한국 신협운동은 철저하게 지역 결사체를 기초로 신용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신규 조합원은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만 조합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협동조합 교육은 모든 신협이 중시하는 핵심 사업이었다. 당시 신협의 업무는 1972년 신협법 제정과 함께 적금을 취급하기까지 거의 대부분 출자와 대부였다. 대부 이자는 3% 이내였다. 1967년의 경우 당시 출자배당율은 평균 8.3%로 은행의 적금 이율보다는 낮았지만 조합원들은 자부심을 갖고 출자했다. 신협운동은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서민의 고리채 척결에 크게 기여했다. 신협운동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여서 1982년에 이미 총자산규모 31억266만 달러로 세계 4위, 아시아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규모화, 합리화란 이름 아래 신협간 합병과 인수 작업이 진행되면서 한국의 신협운동은 결사체 정신을 버리고 사업체로서의 성장에만 주력하게 된다. 그 결과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6백여 개에 달하는 신협이 문을 닫게 된다. 살아남은 신협도 국가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으면서 금융감독 당국에 목줄을 잡힌 채 제2 금융기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에서는 결사체 공제조합 운동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의 공제조합 운동은 자활공제협동조합과 한겨레두레공제조합 등의 활동과 함께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보험을 대체할 만한 공제사업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60여 개에 이르는 법정 공제 조직 이외에 민간의 공제 조직은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특히 일반 기업과 각종 사회단체의 다양한 상조회는 애경사를 중심으로 일정한 소액을 상조금으로 지불하는 일종의 친목 결사체 공제 조직으로서 그 수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이외에도 경희대, 고려대, 서울대, 숙명여대, 연세대, 인하대, 전남대 등 의과대학이 있는 전국의 주요 대학에는 대부분 의료공제회가 있다. 대학 의료공제회는 학생과 대학 임직원, 교수 등 대학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학생들의 경우 등록금과 함께 1~2만원의 의료공제회비를 내면 질병과 부상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외에 이주노동자 의료공제조합,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공제회도 있다.
자활공제협동조합은 지역자활센터(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실업, 기술, 자금부족 등의 이유로 일할 기회를 찾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안정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보건복지부 예산 지원의 민간위탁기관)에 참여하고 있는 수급자와 차상위층, 지역의 저소득층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협동조합과 공제조합을 합한 성격의 조직이다.
조합원이 내는 출자금으로 학자금, 전세계약금, 의료비 등 주로 긴급한 생활자금이 필요할 때 신용 대출을 해주는 사업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공제조합이라기보다 신용협동조합이다. 사업의 목표를 사망, 질병 등의 어려움에 처한 조합원을 협동으로 돕겠다는 상호부조 운동에 두고 있고, 장례 공제사업을 준비하면서 자조운동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공제협동조합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저소득층 주민들은 담보나 신용관계상 제도금융권을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오히려 급전이 필요할 때는 형제나 이웃에게조차 돈을 빌리기도 어렵기 때문에 신용카드나 고리대부업자 등 고율의 이자를 지불하면서 돈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자활공제협동조합은 급속도로 전국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2010년 6월 자활공제협동조합연합회가 결성된 이래 지금까지 지역 자활공제협동조합이 조직된 곳은 약 70여 개에 이른다.
장례문화의 급격한 변화
한국의 장례문화는 불과 10년 남짓 사이에 너무나 급속하게 바뀌어 버렸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대도시 아파트에서도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장례식을 지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집에서 장례식을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례식 장소의 변화
병원
전문장례식장
집
성당
교회
절
1994년
22.6%
0%
72.2%
2.4%
1.4%
0.5%
2005년
68.8%
20.7%
6.9%
1.8%
1.5%
0.3%* 2006년 3월 13일 한국갤럽 발표자료
위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94년에는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집에서 장례식을 지냈다. 고인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삶을 마치고 고인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는 바로 그 방에 가족들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고인을 기렸다. 그런데 10년이 조금 지난 2005년에는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병원이나 전문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집에서 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채 되지 않게 바뀌고 말았다. 매장과 화장에 대한 인식도 10여년 사이에 화장 선호로 급속하게 바뀌었고, 2014년에는 10명 가운데 8명이 화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 2006. 3. 13. 한국갤럽 발표자료
이런 급격한 변화의 요인은 많다. 가족 형태가 급속하게 핵가족화하면서 주거문화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뀐 것도 한 요인이라고 분석된다.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비율
단독주택
아파트
1970년
88.4%
4.1%
1990년
46.1%
35.1%
2005년
19.85
54.3%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례문화의 변화는 공동체의 해체와 극도로 파편화된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이 주요인이다. 극단의 서구 근대 산업화만을 추구한 결과 극단의 시장경제, 상품경제 속에서 사람을 오직 이윤을 낳아주는 노동력으로만 보는 경제제도가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삭막한 풍조는 고스란히 장례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죽음과 주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시장경제가 진리처럼 확고부동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의 장례 문화는 모든 분야가 상품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압축 성장과 함께 압축 상업화가 장례문화를 단기간에 압축 변형시켜 버린 것이다. 공원묘지도 화장장 납골당도 장례식장도 음식도 염습 서비스도 수의, 관 등의 장사물품도 모두 이윤을 위한 장사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장례문화의 상업화는 급기야 장례사업을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신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죽음의 장사’로 변질시켜 버렸다. 다단계 불법 영업이 횡행하고 어떻게 하든지 상주들로부터 추가 비용을 지불하게끔 만드는 교묘한 일종의 사기 영업도 고착화되었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르면서 상주와 상주 가족들은 불신에서 시작해서 불신으로 끝나는 아주 불쾌한 장례식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다.
장례사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묘지와 화장-납골당 분야, 장례식장과 음식, 염습과 수의, 관 등 장사물품과 서비스가 그것이다.
한국의 장례식 비용은 대략 1천만~1천5백만원가량(서울의 경우) 든다. 지역마다 편차가 있지만 장례식 전체 비용 가운데 이 세 분야의 비용이 각각 대략 3분의 1씩 차지한다. 이 세 분야 모두 다양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어느 순간 일반 시민들이 병원 장례식장을 편리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현실의 여러 요인 때문에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일부 병원에서는 장례사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해서 앞다투어 불법으로 장례식장을 만들어 버젓이 영업 행위를 해왔다. 이렇게 수십년 간 병원 장례식장은 불법이었다. 2010년 초에 이르러 법이 바뀌어 기존의 병원 장례식장들만 비로서 합법화되었다.
상조사업은 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부터 수입되어 주로 부산경남 지방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상조회사들은 일종의 선불식 할부거래업으로 회원으로부터 매달 일정액을 불입 받고 회원들의 장례식 행사를 대행해 준다. 상조회사들은 장례식 영역 가운데 염습 등 장사서비스와 수의, 관 등 장사물품을 상품화시켰다. 이 상조회사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다단계 영업을 하기 시작했고, 고객들이 낸 납입금의 50% 이상을, 심지어는 90%를 영업비용으로 지출하는 사기 영업을 일삼아 소비자들의 피해가 급증하면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해약을 해도 해지환급금을 전혀 주지 않거나 상이 발생해서 서비스를 받으려고 상조회사에 연락했는데 이미 그 상조회사는 망해서 없어졌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행히 2010년 9월부터 개정 할부거래법이 시행되어 규제를 강화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상조사업은 일반 시민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장례업의 가장 큰 핵심 문제는 음성의 뒷돈(리베이트) 거래 관행과 수의, 관 등의 폭리 구조이다. 이것이 장례사업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갖고 있는 불신의 원천이다. 상을 치르고 나서 공공연히 요구하는 봉투(뒷돈)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중에 뒷돈(리베이트)과 리베이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장례식 곳곳에 뒷돈(리베이트) 관행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 데가 없다. 보통 장례식 비용 전체의 20~40%가 뒷돈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협동)조합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2010년 1월에 출범하여 현재 장례공제라 할 수 있는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고, 곧 혼인계를 운영할 예정이다. 상포계는 농업 공동체에서 초상 때 드는 천을 마련하기 위한 계모임이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전국 15개 지역의 지역 한겨레두레공제조합과 이들 지역 조합이 연대해서 만든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가 결성되어 임의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 발효 이후에는 임의단체인 한겨레두레공제조합과는 별도로 협동조합 법인격을 새로 조직하고 동시에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를 조직해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 한두레의 상포계 는 장례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협동조합 사업의 성격과 상호부조 활동이라는 공제조합 결사체의 성격이 병존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2009년 4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가 창립 기념 심포지움 ‘경제를 넘어 공제로: 한국 상조사업의 현황과 대안’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된 상조회사의 다양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업적 장례문화를 공동체 장례문화로 바꾸는 근본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2009년 9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으로 공제조합 운동을 해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때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주민운동을 비롯해서 협동조합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지역공동체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역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준비위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13일, 대전 민들레의료생협 교육실에서 13개 지역 한두레준비위 활동가들이 모여 총회를 갖고 13개 지역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준비위와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준비위를 정식 결성하였다.
2010년 2월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공식 출범을 선언하고 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사물품과 장사서비스 제공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돼 즉시 조합원 모집을 중단하고 재점검하는 기간을 가졌다. 근 8개월 동안 뒷돈(리베이트)과 폭리구조 근절의 시스템으로 전면 개편하면서 2010년 10월 말부터 조합원 모집을 다시 시작했다.
임의단체로서 한겨레두레 상포계 사업을 하면서 가장 큰 현안으로 대두된 것은 법인격 취득 문제였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총회의 치열한 논의 끝에 한겨레두레 상포계는 생협 법인으로 등록하기로 결정하였다. 생협법상 법인 설립 인가 조건은 3백명 이상의 조합원과 3천만원 이상의 출자금이었다.
서울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조합원이 3백명을 넘어서고 출자금이 3천만원 이상이 되면서 2011년 5월 3일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법인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바로 서울시에 생협 법인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근 4개월에 걸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할부거래법의 선불식 할부거래와 유사수신행위법 적용 여부에 대한 검토 과정이 있었다. 유사수신행위법 적용 여부는 한두레 상포계의 조합비 적립이 원금 이상의 금액을 지불할 것을 약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선불식 할부거래업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와 다소 긴 논의와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공정위에서는 선불식 할부거래업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최종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런데 서울시는 2011년 9월 20일 서울한두레생협의 설립 인가 신청을 반려하는 공문을 보내왔다. 생협법상 사업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공정위의 유권해석에 따라 내려진 조처였습니다. 서울한두레와 연합회는 자문 변호사에게 법률 검토를 의뢰하고 생협연합회와도 대응책에 대해 협의를 했다. 2011년 말부터 2012년 초까지 서울한두레와 한두레연합회에서는 각각 이사회와 총회를 열어 생협 법인 인가의 재신청을 놓고 논의를 계속했다. 당시 협동조합기본법 논의가 막 시작되고 있던 때였다. 2012년 초, 결국 생협의 재신청보다는 협동조합기본법의 제정을 지켜보고 방침을 정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2011년 12월 29일 협동조합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제정되었다. 이어 11개월 뒤인 2012년 12월 1일 비로소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었다. 서울조합부터 협동조합 법인 창립대회를 다시 열어 설립신고를 하고 법인격을 취득했다. 이로써 한겨레두레 상포계 사업은 현행 법을 준수하면서 협동조합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물신숭배의 풍조에 젖어 죽음마저도 상품으로 거래하고 있다. 한겨레두레 상포계는 이런 상품화를 지양하고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 장례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실천해 나가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상포계 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가고 있다. 홀로죽음을 마을장례로 치르기 위한 상포계 나눔사업을 서울시․종로구와 함께 2년째 진행하고 있고, 상업화된 장례를 마을공동체 장례로 바꾸기 위해 ‘작은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혼인계를 비롯해서 돌잔치계, 팔순잔치계, 혼인계, 여행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또 의료사협, 가사노동자협회, 공동육아과 공동체교육, 돌봄 등과 함께 사회서비스협동조합협의체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사회서비스와 복지분야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댈만한 어떤 공동체도 없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사회, 사막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힘없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흩어져 폐기물처럼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애경사와 같은 큰일이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자 우리 스스로 만든 결사체이며,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지역의 사회안전망이다.
상포계의 특징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상포계는 이런 뒷돈(리베이트)과 장사물품의 폭리구조를 과감하게 없애버렸다. 그래서 장례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고 리영희 선생, 허병섭 목사, 김근태 장관, 장준하 선생, 이내창 열사, 홍근수 목사의 민주사회장을 비롯해 지금까지 500여건의 장례를 훌륭하게 치르면서 장례문화를 혁신하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포계는 무엇이 다른다. 상조회의사 대표격인 A상조회사의 360만원짜리 상품 원가는 화장의 경우 약 14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포계는 장례물품과 인력서비스를 원가로 조합원들에게 제공하고 여기에 24%의 조합운영비만 붙인다. 이렇게 하여 수도권의 경우 조합원에게 최소한 150만원 이상의 직접 장례비용을 절약한다. 거기다 납골당 리베이트를 비롯한 각종의 봉투를 없애고, 특히 장례식장의 주수입원인 음식비를 절약하면 최소한 2, 3백만원 이상을 절감할 수 있다.
협동조합의 힘은 신뢰의 인간관계입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상포계는 같은 조합원이자 상포계 활동가인 전문 장례일꾼(장례지도사)과 접객관리사(도우미)에 장례를 맡기기에 믿을 수 있다. 유족에게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까를 고민하는 상조회사와는 근본부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포계 운영원칙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상포계는 일반 상조회사들의 상조상품과 달리 장례물품과 인력서비스를 원가 그대로 제공합니다. 즉, 매장과 화장(납골당), 장례식장, 음식, 그리고 염습과 장사물품(상조상품 영역) 등 장례식 전체 진행을 직거래의 공동구매를 통해 조합원에게 제공한다. 조합원의 조건에 맞추어 상을 치르는 이런 맞춤형 장례식은 다음과 같은 상포계의 운영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첫째, 리베이트 근절. 상포계는 일체의 뒷돈(리베이트)를 받지 않는 투명한 장례식 진행을 가장 큰 원칙으로 한다. 뒷돈을 받은 것이 드러날 경우에 조합원 상주에게 뒷돈이 거래된 분야의 비용 전체를 배상하고 장례일꾼(장례지도사)은 즉각 제명조치 된다.
둘째, 장사물품 폭리 구조 배제. 수의, 관, 생화제단, 장의차 등에 도사리고 있던 속임수나 폭리 구조를 말끔히 제거해 비용을 대폭 줄인다. 추가되는 발생하는 비용 또한 마진 없이 그대로 조합원에게 제공한다.
셋째, 맞춤형 장례식 진행. 조합원에게 상이 발생하면 상포계의 장례일꾼(장례지도사)은 한 시간 이내에 즉시 출동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바로 상주 가족과 장례식 전체를 협의한 뒤 계약서를 작성하고 장례식을 진행한다. 조합원 상주 가족이 장사물품의 목록을 보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적합한 물품을 맞춤형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상주인 조합원이 미리 준비해 둔 수의가 있다면 구입하지 않으면 되고, 접객관리사(도우미)도 필요한 만큼만 쓰면 되는 것이다.
넷째, 출자금과 24% 조합비.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려면 1구좌(1만원) 이상의 출자금을 내야 하고 이는 탈퇴나 해약시 전액 돌려준다. 또 상포계를 이용하기 위해 매달 3만원의 조합비를 내며 이중 24%는 조합운영비로 사용한다. 개별 정산은 해약과 탈퇴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소비자생협 운영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마진을 남기지 않는 비영리 구조이다.
다섯째, 조합원 교육. 상포계 조합원은 가입 시 반드시 조합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조합원 교육을 받아야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장례사업의 현실과 상포계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조합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며 실제 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출처: tvn작은장례와 품앗이 마을장례
장례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저출산과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2035년에는 전체 2천200만 가구의 68%가 1~2인 가구이고, 65세 이상 900만 가구의 80%가 1~2가구가 될 전망이다. 고령 1인가구는 2015년 172만명, 2035년 409만명으로 고령화와 홀몸가구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망자는 가파르게 늘어나는데 이를 감당할 인구(자손)의 수는 감소한다는 뜻이다. 이제 빈곤에 이어 인구가 큰 문제로 닥치게 되는 것이다.
장례업계에서는 이러한 ‘시장의 확대’에 반색하고 있다. 대형병원 장례식장은 시설을 더욱 확장하고 상조회사들은 화려한 장례식을 통해 비용을 높이고 있다. 그러면서 이른바 엠엔에이를 통해 갈수록 대형화 고비용화 독과점화로 치닫고 있다. 이제 돈이 없으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한많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살아서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다 죽어서까지 홀대 받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작은장례’유일한 대안이라고 보고 2015년부터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다.
작은장례는 병원 장례식장과 전문 장례식장을 이용하지 않고 공공의 장소나 가정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혼례와 마찬가지로 장례도 전문예식장소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이 짜놓은 시스템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한번 상상해 보라. 고인이 평소 자주 드나들던 마을회관이나 노인회관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공공의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의료사협의 병원이나 생협 등 협동사회경제 진영의 공간, 마을공동체와 네트워크, 절 교회 성당 등 종교시설, 마을회관이나 노인회관, 문화센터와 종합사회복지관, 지자체의 공간 등 장례식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데이터베이스화 하고 작은장례 신청자와 연결한다. 장례는 전문 장례식장이 아닌 집이나 공공장소에서 장례를 치러본 경험이 있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진행한다. 시신을 작은장례 장소로 모시기 어렵다면 병원 안치실에 둘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장례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녹색장례, 문화장례, 마을장례가 가능해진다.
작은장례는 녹색장례이다. 작은장례를 치르면 무엇보다 일회용품과 음식물 쓰레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미래세대를 위해 지구환경을 잘 보존해서 물려주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수의대신 평상복을 입을 수 있고, 나무관 대신 종이관을 쓸 수도 있다. 꼭 3일장일 필요가 있는가. 1일장이나 2일장, 대규모 장례가 아닌 소규모 장례로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작은장례는 진정한 자연장인 산골(散骨)을 실현한다. 현재의 자연장은 자연장이 아니라 ‘인공장’이다. 왜 그런가.
1998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화장률은 채 30%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2014년 전국 화장률을 잠정해본 결과, 그때의 배를 훌쩍 넘어 거의 80%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누가 뭐래도 우리 국민들의 보편적인 장법은 화장(火葬)이 되었다. 화장한 유골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화장한 뼛가루를 자연 속의 산 강 바다에 뿌려줌으로써 단기간에 자연에 환원시키는 산골(散骨)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 법률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규정도 내리지 않고 있다. 국립해양연구원에 따르면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것으로 인한 오염이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생물독성 또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에 1천구의 유골을 바다에 뿌려도 부영양화 가능성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날 자연장(수목장림)의 신속한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주장의 조속한 관철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또 그들은 독일의 프리드발트, 그것도 경영을 쳐다보았을 뿐 그들 장례문화에 대한 세심한 관찰, 법제도와 역사 철학과 같은 본질적인 면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한 바와 관련이 없는 공공성이 강한 다른 형태의 자연장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오직 신속한 도입에만 총력을 쏟았고, 공영방송에서조차 수목장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그 과정에서 수목장 열풍이 불어 전국 도처에 무허가 수목장 난립이라는 혼돈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다수 국민들은 수목장이 곧 자연장이라 믿게 되었다. 자연장이라는 말의 뉘앙스 때문에 전통적인 산골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유골을 뿌리는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좀 깊이 들여다본 외국의 자연장은 그 사회의 가족구조의 변동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장법이었다. 때문에 이를 우리의 장법으로 도입하기 위해 보다 많은 연구과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의 자연장은 이처럼 조급함과 미성숙한 데서 출발했고, 때문에 시행착오는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수목장 열풍 속에 중앙과 지방정부들이 나름 열심히 뒤쫓아 갔던 결과물이 바로 공설자연장지였다. 박태호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 전국의 자연장지를 조사하고 나서 ‘과연 이것이 자연장지인가, 인간장지 아닌가?’라고 개탄한 바 있다. 예전에는 경제적인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산에 유골을 뿌렸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강산을 운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사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수산 자연장은 우리 조상들도 많이 사용하던 훌륭한 장법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작은장례는 문화장례이다. 보여주기식 의전중심의 화려한 장례에서 진정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소박하고 품격 있는 장례를 치를 수 있다. 상조회사의 의전서비스는 도를 넘고 있다. 밴드, 화려한 꽃장식, 제복 등 국적불명의 장례문화와 허례허식은 고인이 아닌 고인의 가족을 위한 장례로 만들고 있다. 작은장례는 진정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장례이다. 고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가서 절하고 비싸지만 질은 형편없는 ‘육개장’ 한 그릇 먹고 오는 천편일률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장례가 아니다. 추모영상 상영, 추모시 낭독, 추모 연주, 조문보(고인의 약전과 유족 소개, 장례 절차), 회고담 나누기 등이 가능해진다.
작은장례는 마을장례이다. 얼마전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는 ‘집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한 조합원이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요청한 것에 따른 것이다. 그 어머니는 생전에 “통조림 찍어내듯 장례를 치르는 병원 장례식장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조합원은 새로 긴 천에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새기고 ‘Good bye my mom, 엄마 사랑해’라고 적었다. 이 특이한(?) 플래카드를 보고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이구, 이집 할머니 돌아가셨네’라고 하면서. 고인이 생전에 살던 곳에서 장레를 치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 평소 가깝게 지냈던 이웃이 함께할 수 있다. 음식은 인근 식당에서 만들어 날라왔다. 병원 장례식장의 비싼 음식의 절반에도 못미치지만 맛과 질은 훨씬 뛰어났다. 동네사람들은 조문객이자 유족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고 상을 차렸다. 이 조합원뿐 아니라 어떤 조합원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렀다. 병원장례식장만이 유일한 장례방식이 아니며 제3의 장소에서도 충분히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개념 있는 선택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년 전부터 서울시․종로구와 함께 마을장례지원단 ‘따뜻한동행’을 운영하고 있다. 관내의 무연고, 홀몸어르신을 위해 적십자병원, 나눔과나눔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홀몸어르신들 중에서 장례를 치를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정부에서 지원하는 장제비 이외의 비용을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나눔기금’에서 지원한다. 장수사진 찍기, 구술생애사 기록, 엔딩 노트 제작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죽음을 걱정하던 노인들이 큰 시름을 덜었다며 웃음을 되찾는 모습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무연고 시신을 장례 절차 없이 바로 화장하고, 가난한 이들은 천대받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죽음을 성찰하면 삶이 존엄해진다.
결론적으로 작은장례는 가난한 이들의 싸구려 장례가 아니라 개념 있는 이들의 미래와 후손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자 위대한 결단이다.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빠른 속도로 바꾼 경험이 있다. 이제 화장에서 작은장례로 나아가야 한다. 화장과 자연장으로 장법을 바꿨으니 이제 예식을 바꿔야 한다. 언제까지 장사꾼들의 교묘한 사탕발림에 놀아날 것인가. 김경환 /서울조합. 연합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