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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작은장례

    5월 30일 오전 10시, 돈의동 사랑의쉼터 복지관에서 세 번째 주민추도식이 열렸다. 고인인 고(故)김광남씨는 돈의동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주민들은 고인이 엄격한 성품이었지만 마을과 주민들 일에 관해서는 더 없이 인자했다. 고인은 통신기술로 생계를 유지했고 마을 일에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었다. 아래 윗집에 오랫동안 동거동락한 이웃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다니러 온 이웃의 손주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고인은 4년 전부터 고관절염으로 거동이 편치 않았고 두 번이나 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는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 돈의동으로 돌아온 지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고인이 마을일에 솔선수범했던 덕인지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추도식을 엄수하고 추도식에 참석한 주민들끼리 여담이 오갔다. 까마귀가 와서 울면 주민의 사망소식이 이내 들려온다는 얘기에 그리 생각할 뿐이라는 핀잔도 오갔고, 서울역 동자동이나 영등포 등 다른 쪽방촌에 기거하다가도 돈의동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웃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협동조합 7원칙으로 본 작은장례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가치사업으로 진행했던 작은장례가 안착되면서 ‘마을작은장례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마을작은장례추진위원회는 돈의동 거주민들이 모여 위원회를 결성하고 상이 발생했을 때 부고를 알리고 추모식을 진행하는 자치조직이다. 장례추진위원장은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돈의동 103번지 주민 구술채록작업에 참여했던 박동기씨가 맡았다.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하 한겨레두레)은 ‘2014년 주민제안사업’으로 돈의동 쪽방촌 작은장례를 시작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의 가치를 재확인 하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주민들의 구술사를 정리해 2015년에는 ‘나는 종로 사람입니다’를 펴냈고 2016년에는 “돈의동 103번지(가제)”라는 책자를 펴낼 예정이다. 2015년에는 이 사업을 확장하여 10명의 주민과 장례결연을 맺고 구술채록을 진행했다. 한겨레두레는 작은장례를 사업의 형태로 진행하지만 이는 명칭에 불과하다. 작은장례로 인한 수익은 전혀 발생하지 않는 지역연계형 사회공헌이다.  국제협동조합연맹의 협동조합 7원칙을 적용해보자면 한겨레두레의 돈의동 작은장례사업은 제7원칙인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에 충실한 활동이었다. 작은장례는 비뚤어진 자본주의가 침탈한 공동체문화를 복원하고 자본이 점령한 상장례문화를 바로잡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된다. 이 사업을 한 번의 이벤트성으로 끝내지 않고 사무국이 끊임없이 지역사회인 사랑의쉼터 복지관과 유대관계를 만들어나간 것은 협동조합의 가치를 드높이는 역할이 되었다.  마을장례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한 작은장례가 주민자치 조직으로 이양되는 수순을 밟는 과정은 협동조합의 제5원칙인 교육, 훈련 및 정보 제공에 해당된다. 장례추진위원회장이 된 박동기씨는 마을장례를 꿈꾸던 주민이다. 주민이 꿈꾸던 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한겨레두레는 시범을 보였고 작은장례가 동기가 되어 마을작은장례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오늘 박동기씨는 한겨레두레 상포계 실장의 진행을 눈여겨보았다. 두 번째 추도식부터 박동기씨는 주민상주를 자처해 완장을 찼고 다음번부터는 추도식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을 내비쳤다. 네 번째 돈의동 주민 추도식은 6월 24일에 있을 예정이다. 네 번째 추도식에는 식전에 형식절차에 관한 마을작은장례추진위원회 사전교육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겨레두레는 지난봄부터 서울조합 사무국장이 희망제작소에서 여는 모금학교에 참석해 모금운동에 대한 교육을 이수하고 있다. 교육의 일환으로 잉쿱, 행복한마을의료사협과 함께 네트워킹데이를 열어 작은장례에 쓰일 후원금을 모금했다. 당일 참석자는 많지 않았지만 단기간의 홍보와 시범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후원금을 답지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는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제4원칙, 자율과 독립을 위해 사회적기금을 조성한 것이다.  한겨레두레 뿐 아니라 이날 네트워킹데이 후원의 밤 행사에 참여했던 잉쿱과 행복한마을의료사협도 각자의 서비스영역에 대한 취약계층 후원이라는 분명한 목적으로 가지고 후원기금모금에 나섰다. 방향이 선명하고 목적이 분명할 때 모금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또한 한겨레두레는 이미 1%의 공동체 기금으로 지역 사회공헌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라는 제3원칙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주민과의 진정한 연대  자본과 권력의 대안을 찾는 조직과 활동가들은 하나같이 같은 결론을 말하곤 한다. 결국은 사람이라고. 이 날 추도식이 끝나고 한겨레두레 사무국과 상포계팀, 추도식에 참가한 조합원은 사랑의쉼터 담당복지사와 한 자리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추도식에 참석한 주민들도 같은 곳에서 밥을 먹었다. 세 번의 추도식을 모두 참석한 조합원에게 박동기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다음번에는 자치적으로 해낼 수 있을거라는 이야기도 건넸다.  추도식이 참석한 주민들은 대부분 성장을 하지 않았고 슬리퍼에 맨발이기도 했다. 꽃이라도 한 송이 놓아주겠다고 몰려든 주민들은 진심으로 고인을 애도하고 있었다. 돈의동을 빠져나올 때 지난 해 장례결연을 맺은 주민이 고단한 얼굴로 폐지를 묶고 있었다. 사무국장은 그에게 안부와 건강을 물었다. 주민은 치통이 심해 밤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이상고온으로 점심 무렵부터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장례엔 화려한 화한이 가득한 병원 장례식장에서 봉투에 지폐를 넣으며 지인과 부의금의 적정한 액수를 상의하는 장례식과 다른 것이 있다. 세상의 한 복판에서 가장 쓸쓸하게 살다 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고인의 삶은 섣불리 측정하거나 예단할 수 없다. 인간사이의 애도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누구나 기억될 권리가 있고 애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협동조합이 지향해야 할 가장 큰 가치다.  가장 작은 인간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큰 줄 안다. 사람은 성숙해지며 자아의 무게를 점점 줄인다. 작아지고 작아진 자아가 사람들 틈으로 스며들 때, 인간의 삶은 완성된다. 죽음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홀씨를 뿌리는 커다란 나무처럼,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목적 없이 진심으로 애도하다보면 타인의 삶은 부지불식간에 내게 와 스며든다.  취약계층과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은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다. 아침부터 술냄새와 지린내가 진동하는 골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는 것은, 타인의 삶과 내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은 자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일이다. 이 일이 작은장례다. 신속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이 시대가 추구하는 모든 것에 반(反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거꾸로 가는 걸음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마을장례추진위원장인 박동기씨는 추석과 설날엔 마을공동차례도 제대로 지낼 예정이니 꼭 오라고 당부했다. 사업으로 접근했다면 손을 잡고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사람이다. 누가, 누구와 같이 했느냐가 협동조합의 가치를 만들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이하나 조합원. 코코뉴스 편집장  

    관리자 작성일: 2016-07-17 조회:962

    협동조합에 대한 단상(斷想)

    시대적 과제 - 경제민주화와 보편적복지 실현1990년대 구소련의 붕괴이후 급속한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하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저명한 세계의 석학들은 ‘향후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은 불가능한 시대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고 있는 세계경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고,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는 1%의 소수에게 부가 편중되어있으며, 나머지 99%는 극심한 빈곤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심화되는 빈부격차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데, 특히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며 사회양극화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문제에서 우리나라도 자유롭지 못하며, 사회양극화 해소가 중요한 국정과제이며 사회적 과제가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경제민주화, 보편적복지 실현이 우리사회의 주요한 화두이며 시대적과제로 대두되었다. 새로운 대안 - 협동조합운동 활성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정치, 사회, 경제영역의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고 사회양극화를 해소 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하며, 향후 경제민주화와 보편적복지 실현에 한 축을 담당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후 현재 약 9,400여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협동조합이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관심 속에서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건강하고 건전한 협동조합으로 뿌리내리고 발전하여 경제민주화와 보편적복지 실현에 기여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심과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양적인 성장에서 - 질적인 성장으로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2015년 기획재정부의 협동조합 실태조사에서, 기 설립된 전체 협동조합의 사업 운영률이 50%대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사업을 운영하는 조합들의 대다수가 영세하며 적정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협동조합기본법과 충돌되는 타 관련법에서의 역차별 문제, 협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지닌 일부 정치, 경제, 사회 영역의 보수적인 시각, 협동조합에 대한 올바른 이해부족 등 범사회적 환경이 성숙되어 있지 못한 측면도 존재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협동조합 참여자들의 품성과 자세 및 의식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고, 협동조합 다운 협동조합을 통하여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경제적 성장에 기여하는 건강한 협동조합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뼈를 깎는 성찰과 각고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 된지 4년차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향후 협동조합 발전의 튼튼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는, 이제는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장에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호세마리아신부의 생각’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질적인 성장은 -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에서부터 출발  협동조합은 사람 중심이다. ‘협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간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호세마리아신부님은 이야기 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호세마리아 신부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의 이상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며, ‘사람이 먼저이고, 협동조합은 나중이다’라고도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협동조합은, 사람 중심으로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 개개인의 성찰과 발전, 책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숙한 민중은, 부와 명예보다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공존방식을 고민하는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며, ‘협동조합 또는 사회발전의 토대는 개인의 도덕적 발전이 토대가 된다’라며 조합원 개개인의 자아발전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협동조합운동을 통하여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선 확보는 각 개인의 이타심으로부터 출발 한다’라고 하면서 ‘협동하되 이기려 들지 말고, 창조하되 소유하려 들지 말고, 진보하되 지배하려 들지 말라’라고 한다. 그리고 조합원들의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건강한 협동조합운동의 기초가 튼튼하려면 책임감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라고 이야기 한다.   협동조합운동의 지속성은 교육으로부터 출발한다. ‘협동조합이 정체되지 않으려면,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훈련시켜야 하고, 교육과 훈련이 경제적 이윤이나 투자수익보다 훨씬 더 수익성이 높다’라고 이야기 하며 ‘교육은 피와 같아서 사람들에게 협동과 품격을 부여 한다’라며 교육을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또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리더쉽 양성은 경영의 안정화에 기여하기에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꾸준히 지속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하며, 협동조합 교육을 단순히 협동조합의 발전적 토대를 쌓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보적인 사회변화를 위한 방법으로 인식하며 ‘협동조합주의는 교육적 수단을 활용하는 경제운동이며, 또한 경제적 수단을 활용하는 교육운동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협동조합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이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도록 인간교육을 해야 하며, 또한 필요한 활동에 적절한 수준을 보장 할 만큼 자본화 과정도 끊임없어야 한다’라고 조언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협동과 연대를 통하여 확장되고 성장한다. ‘연대한다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뿐 만아니라 그들이 되어야 하는 모습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며 ‘연대의식을 갖추고 협동조합에 기꺼이 조합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공동선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양보할수록 효과적인 연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다’라며 조합원 개 개인들의 연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품성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효과적인 연대를 위해서는 ‘공동선을 얼마나 달성하느냐는 보통 협동조합 사람들의 규율과 상호 신뢰의 정도에 달려있다’라고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기업을 지탱하는 것은 연대이고, 연대의식은 우리가 서로 신뢰할 때만이 가능하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한편 협동조합운동의 확정성과 관련되어서는 ‘협동조합운동은 연대, 정의와 자유라는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하고, 이와 동시에 경제, 금융, 사회, 정치 분야의 조직들을 개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한다. 물론 협동조합운동의 근본정신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라고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협동조합의 경쟁력은 협동과 연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협동조합운동은 단순히 사업체가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지향한다. ‘협동조합운동이 사회의 저변에서 기획되어 발전된 것이 아니라, 나아가 교육환경과 사회관계 및 경제생활에 스며들지 못한다면 그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라며 지역사회와의 관계와 사회적 가치 실현을 중요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협동조합운동은 뿌리 깊은 민주주의에 부합하며, 자유를 향하는 실질적인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시민과 노동자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유와 복지를 추구하고 쟁취하기 위한 시도였다’라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단순히 사람의 발전을 위한 길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길로 제시된 것이다’라고 하며 ‘협동조합은 인간을 통합시키고 경제적, 사회적 과정에 정의를 실현하여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소론 - 협동조합의 본질에 충실하자   이 글은, 제한된 지면과 필자의 부족함으로 ‘호세마리아신부의 생각’이 우리에게 주는 담론을 올곧게 다 정리하지 못한 한계가 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협동조합에 입문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분들과 협동조합에 새롭게 진입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훌륭한 길잡이이며 지침서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협동조합의 가치와 철학, 원칙에 충실할수록 성공한 협동조합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재차 확인 할 수 있었고, 책을 읽으면서 호세마리아신부님을 좀 더 깊게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소회를 고백하며, 글을 마친다. 글/ 유영우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 이사. 논골신협 이사장

    관리자 작성일: 2016-05-26 조회:1,202

    노년에 입문하다

     왼쪽 발목이 부러졌다. 하산길에 방심하다 움푹 패인 곳을 디뎠다. 발목이 거의 직각으로 꺾인 듯했다. 강렬한 통증이 뒷머리를 때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응급차에 실려 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걸을 만했다. 복숭아뼈 부위가 부은 것 말고는 말짱한 듯했다. 그런 상태로 일주일을 돌아다녔다.    나이는 도둑처럼 다가온다   약간 저릿저릿하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일을 키웠다. 밤새 끙끙 앓았다. 다음날 정형외과를 찾아 엑스레이를 찍었다. 복숭아뼈 일부가 떨어져 나갔단다. 아니 어디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골절이? 아주 불친절한 의사는 그럴 수 있다고 퉁명스레 말한다.    평소 병원에 대한 불신이 그 지경을 만들었다. 다치자마자 바로 병원에 갔었더라면…. 무릎 아래까지 깁스를 했고 목발(사실 금속이다)을 지급받았다. 의사는 절대 왼발을 딛지 말라(심지어 실내에서도)며 2주일 뒤에 오라 했다. 의사의 지시대로 해보려 나름대로 애썼다.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낸 후 두 번째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는 전혀 차도가 없다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다시 2주일 후에 오라 했다.    후배의 어린 아들(열살)도 비슷한 시기에 깁스를 했다. 그 아이는 2주일만에 깁스를 풀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아주 불성실했음에도 나보다 훨씬 회복이 빨랐던 것이다.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드니 이제 뼈도 잘 안 붙는구나. 깁스 덕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니 심사가 복잡해진다.    현기영 작가는 “어느 나이가 되니까 다른 것들이 보인다”며 “늙어간다는 느낌도 상당히 좋고 새롭다”고 했지만, 아직 그 나이까지는 아니어서 그런지 괜히 울적해지고 억울한 느낌만 든다. 나도 모르게 나이는 도둑처럼 다가왔다.    노안(老眼)이 온 지는 이미 꽤 됐다. 머리숱도 성글어지고, 치아는 갈수록 부실해 진다. 어금니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 무리한 날이면 잇몸이 붓는다. 가끔 이명 현상도 느낀다. 귀에 솜을 틀어막은 것처럼 멍멍해진다.    가을에만 찾아오던 알레르기성 비염은 이제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눈도 침침해져서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 짧아진다. 밥 먹다 자주 흘리고 입가에 뭐를 잘 묻힌다. 피부 탄력은 줄어들고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문득 거울을 보면 낯선 이가 거기 있다. 나이가 드는구나. 50대 중반을 향하면서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100세 시대, 회색 쇼크, 인생 2막… 고령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트렌드라고 한다. 나의 노년은 어떨까. 막막하고 불안하다. 가족은 너무 멀리 있고 벌어 놓은 것도 신통치 않다. 환갑을 전후해서 일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다음에 무엇을 하지? 혼자서 병들면 또 어쩌지? 깁스만으로도 이리 괴로운데….   ‘철든 노인’을 준비하자   바야흐로 100세 시대라고 한다.    고전학자 고미숙에 따르면 100세 시대는 문명의 성과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수명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현대인이 100세 인생-장수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문화와 그에 따른 생로병사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없는 상태로 대부분을 보낸 삶은, 산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은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핵심이지 그저 객관적으로, 양적으로 시간이 늘어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철없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이듦은 완숙한 인간미를 갖는 과정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꼭 곱게 늙어야 하나’라고 되묻는다. 머리숱이 풍성하고, 허리가 곧고, 주름이 없고, 체액이 통제되는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하는 몸에 대한 비현실적인 욕망이야말로 정상적인 나이듦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몸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죠. 우리는 육체적 고통, 신체적 비참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몸 밖의 대소변’을 수용할 때, 살아 있는 이웃들의 다양한 몸도 존중할 수 있어요. 인간이 사망하기까지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 그 취약하고 ‘못생긴’ 시절도 소중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늙고 병들고 추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자.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 쭈글쭈글한 나를 긍정하고, 또 다른 나를 이해하자.    노년의 아름다움과 가치는 육체에 있지 않고 ‘지혜’에 있다. 지혜란 결국 나이 들고 기억력이 떨어져 쓸데없는 ‘반(反)지식’이 사라져야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이다. 낙엽이 떨어져야 나목(裸木)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듯, 나이듦 없이는 세상을 명료하게 볼 수 없다. 물리학자 장회익 선생은 노년은 홀로 사유하고 스스로 깨우치는 기적의 시간이라 강조한다.    “지식에는 진정한 지식과 잘못된 지식 두 가지가 있어요. 완전한 무지는 없어요. 잘못된 지식, 이것이 문제죠. 그런데 노인이 되면 지금까지 잘못된 채 쌓여 있던 지식이 자꾸 떨어져요.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쓸데없는 기억부터 사라지게 돼요. 쓸데없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 정말 중요한 것만 보여요. 그리고 넓게 멀리 보이죠. 이것을 모으는 게 지혜입니다.”   내적인 충만, 추함의 수용, 타인에 대한 이해, 자연과의 교감, 고갱이만 남은 지혜, 여유와 너그러움…. 나이듦은 이런 미덕을 배워 가는 소중한 과정이다. 그래 항복하고 순명하자. 그리고 잘 늙어가자. 노년에 입문하겠다고 마음먹자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처음보다 깁스가 덜 불편하다.   글/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 상임이사  

    관리자 작성일: 2016-05-03 조회:1,093

    뜻깊은 작은 장례식

      이정모 서대문자연사 박물관장의 글은 쉽고 솔직하고 재미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해박한 자연과학 지식을 동원해 맛있게 요리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이 관장이 이번엔 장례에 관심을 가졌다.

    관리자 작성일: 2016-03-28 조회:1,528

    인간의 얼굴로 마주 보다

    - 무연고 고인의 추모식을 진행하며   돈의동사랑의쉼터 작은장례당신은 ‘그’를 본적이 있는가.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를 나와 탑골공원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는다. 예전 파고다 공원이 있던 자리에는 마트가 들어 서 있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있었던 노점에는 대낮부터 잔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이들이 눈에 띈다.   배제당한 이들의 최후의 거처  탑골공원 건너편, 즐비한 모텔 길을 따라 들어서면 돈의동 103번지가 나온다. 방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 작은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 일련번호를 매기면 맨 마지막에 남는 번호, 748호까지의 방이 그곳에 있다. 좁은 골목길은 어두운 강처럼 흐른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이들이 그 강을 건너 돌아온다. 더러 1만 원짜리 잠자리를 찾는 뜨내기들도 그 강을 건넌다.   그가 이 동네에 들어온 것은 40대 초반이다. 그때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났다. 그에게도 거칠 것 없던 시절은 있었다. 그런데 인생은 번번이 그를 배신했다. 노동을 마다한 적도, 게으름을 피운 적도 없는데 삶은 풀리지 않았다. 배움이 짧으니 몸으로 때우며 살았다.   가난은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노동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병을 얻었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야 했다. 돈의동 103번지에는 그와 같은 이들이 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지난 2월 23일 돈의동사람의쉼터 지하교육관에서 조촐한 추모식이 열렸다. 1월 21일에 이어 두 번째이다. 6평 공간에서 쪽방에서 살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작은장례를 치렀다. 작은장례는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소박하게 치르는 장례를 말한다. 가까운 곳에서 장례를 치러야 생전에 고인을 알고 지낸 이웃이 찾아올 수 있다.   한쪽 벽에는 울긋불긋한 만장형 추모기들이 우뚝 서서 가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이번 추모식에서는 세 분의 고인을 모셨다. 고인인 정아무개씨는 서른 살 남짓한 젊은 아가씨이다. 가출한 지체 장애인. 앵벌이. 그녀에게 붙는 수식은 이 사회 가장 밑바닥을 가리키는 언어들이다. 쪽방촌에 들어올 때부터 아팠고 결국 두 달 만에 고인이 되었다.  제단 위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위패가 그들의 이력을 대신한다. 쪽방촌에서 단 삼일을 살다가 간 이도 있고 10년 가까이 머문 이도 있다. 고아무개씨는 이웃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가난과 불평등,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작은장례를 치르는 동안 막막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두 번의 작은장례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서울시는 비로소 무연고자를 위한 추모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미 무연고자 추모식을 진행해 온 서대문구는 기초생활수급자들까지 작은장례를 확산할 계획이다. 종로구에서도 중점 사업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연고나 가족이 없는 쪽방촌 주민에게 ‘작은장례’는 희망의 이름이 되고 있다. 살아서 죽음을 걱정하는 불안함을 덜게 된 것이다. 2014년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무연고 사망자는 1년에 1008명으로,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섰다. 앞으로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쪽방촌의 주민은 이 사회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배제된 사람들이다. 위패에 적힌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대입한다. 작은장례는 그들을 위한 것이지만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시 인간의 얼굴로 그들을 마주본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예의를 생각하며 지금 여기서 희망을 만들어 본다.   글/․ 우은주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 사무국장

    관리자 작성일: 2016-03-08 조회:1,298

    하늘우물에서 거인을 깨우다

    김선우의 장편소설

    관리자 작성일: 2016-01-18 조회:1,381

    밥상공동체와 협동의 조직문화

    공간은 시간을 지배한다. 공간의 역사는 시간의 역사이다. 2009년 돈 한 푼 없이 오로지 ‘뜻과 사람’만 믿고 시작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곁방살이를 전전했다. 그러다 종로구 서촌 환경운동연합이 작은 공간(책상 두 개가 겨우 들어가는)을 내줘서 둥지를 틀 수 있었다. 대표의 숙소를 겸한 작은 옥탑방도 하나 얻어 연합회 사무실로 썼다. 그러다 2012년 10월 사직동 사회과학자료원 5층으로 옮겼다. 서촌에서 마을운동을 하는 ‘품애’의 공간 일부를 나눠 쓰는 조건이었는데 널찍한 강의실과 구내식당이 있어 조합원 교육과 모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접근성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는 도약의 전기가 되었다. 공간의 역사  처음으로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이로부터 1년 후였다. 고지에서 평지로 내려왔는데 사방에서 햇볕이 들어오고 통기가 잘되는 좋은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밝아서 좋았다. 마음이 다 환해지는 것 같았고 희망이 샘솟았다. 32평 사무실을 최소 비용으로 꾸미려고 노력했다. 상근자들이 틈나는 대로 천장을 걷어내고 바닥을 깔았다. 중고 사무용품을 사오고 버려지는 집기를 주워다 주방을 꾸몄다. 그런데 너무 큰 싱크대와 수납장을 가져온 것이 문제였다. 어찌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기왕 이리 된 것 밥을 지어먹자’고 의견을 모았다. 전체 공간에 비해 조금 큰 듯한 주방 겸 휴게공간이 마련되었다.  2인1조로 당번을 정해 일주일씩 돌아가며 밥을 지어먹었다. 한달에 한번꼴로 당번이 돌아왔다. 당번들은 에코생협과 인근 시장에서 재료를 구입해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이렇게 6개월을 계속했다. 처음엔 이견도 많았다. 너무 번거롭다, 시간낭비다, 지저분해진다, 행사(장례)가 발생하면 당번 혼자 해야 한다…. 다 맞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극심한 갈등을 치르고 난 터라 이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사실 문제를 수습하느라 급급했고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창립 멤버와 그 이후 입사한 이들이 뒤섞여 있었고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밥을 지어 먹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육류 알레르기가 있는 동료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금물이었지만 닭고기는 먹을 수 있었다. 사상체질식을 하는 이는 두부와 달걀, 비늘 없는 생선을 먹으면 금세 발진이 올라왔다. 대파를 먹지 못하는 이사도 있었고, 수박 알레르기가 있는 조합원도 있었다. 이 모든 조건을 감안해서 밥상을 차리는 일은 ‘예술’에 가까웠다.   제한된 식비 내에서 음식을 차려내는 일은 고도의 ‘기획’이 필요하다. 메뉴를 정하는 일에서 값싸고 질 좋은 재료를 구매해 조리하는 일은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참 힘든 일이었다. 갖가지 양념을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어 다음 당번에게 지장을 주지 않아야 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제때 처리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요리를 잘하고 즐거워하는 이도 있었지만 아예 라면조차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예고 없이 친구들을 여럿 대동하고 밥 때에 맞춰 나타나 당황하게 만든 이도 있었다. ‘밥상공동체’를 자랑하고 싶었던 그의 예측불허 행동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밥상을 두고 마주 앉으면 자연스레 대화를 하게 된다. 허겁지겁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것과는 다르다. 예측불허의 그 동료는 활기가 넘치고 남다른 에너지로 일을 잘 벌이지만 세심하게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소에 점심밥을 해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사회나 총회, 이런저런 모임에서도 밥을 지어먹었다. 그것이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협동은 돌탑을 쌓는 일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제멋대로 생긴 돌들을 하나하나 맞춰서 멋진 돌탑을 쌓아올리는 것 같았다. 식비를 대폭 줄인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서로 인정하는 것, 그것을 조건으로 껴안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 못마땅해도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서로의 주장이 맞설 때 한 걸음씩 양보해야 한다는 것, 일상은 타협의 연속이라는 것…. 오늘 동료들, 조합원들, 손님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내야 하는 것은 작지만 큰 사명이다. 밥 때가 되어 그냥 식당으로 이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움직여서 시장을 보고 재료를 고르고 이를 다듬어 음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주인의 경험이다.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메뉴를 정하고 이를 차려내고 뒷수습까지 하는 것은 모든 일의 원리와 동일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대가는 아무것도 없다. 맛있다, 잘 먹었다는 얘기 한마디면 족하다. 다 먹고 난 그릇을 닦는 일은 마음을 닦는 일이다. 찬물에 손 담그는 궂은일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싫어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을 묵묵히 해온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할 수도 있다. 좋아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3호선 경복궁역 인근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사무실은 금세 협동사회경제 진영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0여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작은 회의실을 무상으로 빌려줬다. 오시는 분들에게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쪄냈다. 사무국장이 주재하는 회의가 있으면 이사 상무가 앞치마를 두르고 나섰다. 밥상공동체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타고나면서부터 협동조합을 해본 이가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그 시기 그 공간에 놓여서 경험할 뿐이다. 창립 6주년을 맞이하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요즘 ‘협동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다. 명령과 지시, 정해진 규칙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예컨대 호칭 문제가 그렇다. 직급직책 대신 어떤 호칭이 어울릴까. 님, 씨, 별칭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온다. 각종 규정규칙 또한 그렇다. 일반 기업의 규정규칙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가장 쉬운 선택이다. 협동조합의 규정규칙에 어떻게 협동의 가치와 정신을 불어넣어야 할까. 시간이 좀 걸리고 번거롭더라도 하나하나 토론을 거쳐, 구성원의 동의를 거쳐 생명력 있는 규정규칙을 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머리로 치열하게 생각하고 구체적인 데이터를 갖고 깊이 연구해야 한다. 느슨한 듯 하면서 팽팽하고, 자유로운 듯 하면서 짜임새 있는 조직문화는 무엇일까.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면서 존중하고, 효율적이고 일사불란한 조직문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율은 힘이 없다. 반면 조직공학적인 기술(실무능력)만 뛰어난 조직은 푸르른 생명력이 없다. 자율과 민주의 원리가 살아 숨쉬면서 실력도 출중한 조직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새로운 것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앞에는 수평과 수직을 조화롭게 교직해서 아름다운 천을 짜야 하는 즐거운 사명이 놓여 있다.   글/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 상임이사

    관리자 작성일: 2015-12-31 조회:1,418

    고독의 시대 공동체 장례의 미래

                                                                       출처:tvn공동체 장례문화의 붕괴 티브이엔의 ‘응답하라 1988’은 쌍팔년도(1988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을 배경으로 한 유쾌하고 가슴 짠한 가족극이다. 얼마 전 방영된 편에는 전라도 어느 시골마을의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할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도착한 시골집 대문을 연 주인공(성덕선)은 생전 보지 못한 풍경과 마주한다. 흐릿한 전구가 불을 밝힌 한옥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채 왁자지껄 술잔을 기울이는 어른들. 아낙네들은 가마솥 뚜껑에 전을 붙이며 음식을 나르느라 바쁘고, 물색 모르는 아이들은 괜히 신이 나서 여기저기 뛰어 다닌다. 술을 마셔 불콰해진 아버지는 덕선과 보라, 노을 삼남매를 술자리에 불러 앉히고 친척들에게 소개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왜 아버지는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슬퍼하지 않는가. 왜 친척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는가. 어머니는 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가. 좁은 방에서 사촌들과 누워 칼잠을 자면서도 덕선의 머릿속에는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빈소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아버지는 외국에서 막 도착한 형을 껴안고 오열한다. “우리 형 불쌍해서 어쩔거나. 엄니 얼굴도 못보고…. 머가 그리 바빠서 빨리 갔소. 엄니 보고 싶소, 보고 싶어 미치겄소.” 이때서야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형제와 친척들이 서로 얼싸안고 통곡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덕선과 아이들은 알았다. 어른들은 슬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견디고 참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지금은 이런 장례식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그랬다. 30, 40대 정도만 해도 이런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신나게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에 들어섰는데 아주 낯선 풍경과 마주한 경험. 뭔가 엄숙하고 기이하며 약간은 당황스럽고 무서웠던 그 분위기. 어느 집 대문에 ‘謹弔(근조)’라 쓰인 노란 조등이 은은히 불을 밝히고, 작은 마당엔 이웃 사람들이 웅성웅성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거친 삼베로 만든 굴건제복을 입은 상주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문상객을 맞이하고 맞절을 한다. 향과 초는 마루에 차려진 제단에서 타오르고. 어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을장례 풍경이다. 어느 골목 귀퉁이에는 장의사가 있었고, ‘염쟁이’라 불리는 아저씨가 있었다. 초상이 나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 아저씨를 찾았다. 마을장례는, 심지어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서도 치렀다. 초상이 나면 아파트 주차장에 차일을 치고 문상객을 받았다. 이러한 공동체 장례문화는 불과 20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삶을 마치고 고인의 숨결이 남아 있는 바로 그 방에서 가족과 친지가 함께 모여 조용히 고인을 기리던 문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극단의 서구 근대 산업화만을 추구한 결과 시장경제, 상품경제 속에서 사람을 오직 이윤을 낳아주는 노동력으로만 보는 경제제도, 그래서 늙고 병들면 쓸모없어진 낡은 부품처럼 폐기물로 처리되는 삭막한 풍조가 고스란히 장례식의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의 주인인 세상 이전에 죽은 조상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식의 죽은 자가 아니었다. 죽었으되 죽은 자라로 할 수 없었던 존재였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고, 조상숭배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전제로 했다. 자신의 생명은 혈연으로 연결된 조상과 자식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서구 과학기술주의와 함께 고인의 시신은 그저 처리해야 할 골칫덩어리의 물질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상숭배란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 과거의 미신이자 낡은 비과학의 신앙으로 치부되고 만 것이다. 죽음과 주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시장경제가 진리처럼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의 장례문화는 극단적으로 상품화해 버린다. 압축성장과 함께 압축상업화가 장례문화를 단기간에 압축 변형시킨 것이다. 공원묘지도, 화장장 납골당도, 장례식장도, 음식도, 염습서비스도, 수의 관 같은 장사물품도 모두 이윤을 위한 장사판이 된 것이다. 장례문화의 상업화는 급기야 장례사업을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신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죽음의 장사’로 변질시켰다. 다단계 불법영업이 횡행하고, 어떻게 하든지 상주들로부터 추가 비용을 지불하게끔 만드는 교묘한 사기영업도 고착화되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상주와 가족은 끝나는 순간까지 아주 불쾌한 장례식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 참담한 현실이다.   공제조합과 두레, 협동조합 공제조합이란 생활상의 각종 어려움을 조합원의 상호부조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결사체 조직(association)을 말한다. 공제(共濟)의 한자말을 해석하면 함께 공(共), 구제할 제(濟), 즉 더불어 구제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조상들의 두레와 계 등과 같은 것이다. 20세기 초, 조선이 망한 뒤 우리가 추구한 가치는 전통 농업사회의 유산은 모조리 땅 속에 묻어버리고, 철저하게 서구 근대화 산업화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사상과 문화, 전통 농업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문물은 낡고 창피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여기며 폐기해 버렸다. 그 자리를 서양 문물과 문화가 대신했다. 두레나 계도 그렇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서구의 공제조합과 협동조합이 들어오게 되었다. 공제조합은 서구 근대화, 산업화의 산물로서 서양의 ‘benefit society’, ‘mutual aid society’ 등을 번역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사회, 개인, 국가, 민족, 철학, 사상, 형이상학, 학문 등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어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과 중국보다 먼저 서구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에서 만든 한자 번역어이다. 협동조합도 공제조합도 일본이 만든 조어이다. 서구의 공제조합은 역사가 고대 로마의 콜레기아(collegia, 예컨대 우리나라의 상포계와 같은 모임으로 가난한 로마 시민들의 장례 공제조합인 콜레기아 테누이오룸collegia tenuiorum)나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도시 코뮨과 촌락 코뮨에는 자유인의 길드 조직과 함께 다양한 공제조직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인들의 연대체인 중세의 도시공동체와 촌락공동체는 근대 국가의 출현과 함께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근대 국가란 도시와 농촌의 자치공동체와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산업혁명과 탄생한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이전의 세상과는 전혀 체제였다. 동시에 역사상 전혀 색다른 새로운 계급인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탄생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노예보다도 못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10살 이하의 어린애가 탄광 속에서 하루 18시간 이상의 노동을 강요당했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기계 부속품처럼 혹사당하다가 곧 폐품으로 버려졌다.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채 30살이 되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했다. 서로 뭉쳐 상부상조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노동자들은 해체된 길드와 각종 공제조직들을 현실에 맞게 다시 복원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 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친목모임과 공제조직이 있었다. 우애조합(friendly society), 형제조합(fraternal organization), 오드펠로(oddfellow), 상호부조조합(mutual aid society), 신용조합(credit union), 노동조합(trade union), 통신협회(corresponding society), 자조그룹(self-help group) 등이 그것이다. 이들 노동자 조직은 국가의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았다. 영국은 1799년 그 유명한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모임과 파업 집회 시위 등을 원천 금지시켰다. 노동자들이 모임을 만들면 곧바로 구속되거나 기소되었다. 노동자들의 집회와 파업에 대해서는 즉각 총칼을 동원해 학살하고 해산시켰다. 노동자들의 모임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모임의 명칭은 비밀 통신협회, 비밀 우애조합 같이 앞에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결사체를 뜻하는 영어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에는 이처럼 국가로부터의 독립과 자립 자치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오늘날 협동조합운동의 제4원칙인 ‘자율과 독립’에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자립, 자치운동이라는 서구 노동자 조직운동의 역사에가 담겨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질병, 부상, 화재, 장례, 혼인, 출산 등 이러저러한 애경사에 부닥치게 되고, 이를 혼자서 치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공제조합을 조직, 일정액의 조합비나 곗돈을 모아두었다가 애경사나 기타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쓴다면 훨씬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다. 보험은 애초에는 이런 공제조직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자본주의 보험 상품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목적 아래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의 보험은 철저히 영리의 관점에서 운영되고 있다. 공동체 속에서 상호부조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가장 가깝고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공제조합과는 근본에서부터 다르다. 공제조합과 협동조합은 자유인들의 결사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사업체임에 견주어 공제조합은 특별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이를 해결하는 상호부조 조직이라는 점이 다르다. 공제조합은 한꺼번에 많은 재화와 일손이 필요할 때 이웃 주민과 동료 간의 연대와 연합의 힘, 결사체의 성격이 더 강하다. 서구 유럽의 공제조합은 나라별로 그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른 유형으로 발생하고 변화해 왔다. 영국에서는 1719년 뉴캐슬 제화공 공제조합이 최초로 조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 영국에는 무려 7천200여개의 공제조합과 우애조합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 약 2천여개의 공제조합과 조합원 10만여명이 조직돼 있었고, 19세기 말에 약 1만3천 개의 공제조합과 210만여명의 조합원으로 급증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공제조합의 조합원 수는 20세기 초에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18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자본주의 산업 국가 체제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똑같이 경쟁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내면화시키면서 적응하고 있었다. 오직 이윤과 돈을 신으로 숭배하며 극단의 물신주의로 치닫던 노동자들이 생각을 바꾼 것이다. 경쟁 지상주의를 벗어나 상호부조와 협동의 기치를 다시금 높이 쳐든 것이다. 서구의 협동조합과 공제조합, 우애조합 운동은 이처럼 코뮨과 길드의 후손이자 자유인들의 연대 운동의 재생이었다.   우리나라 공제운동 오랫동안 한국의 농민들은 두레라는 강력한 농업공동체를 조직해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 왔다. 그리고 서로 상호부조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한국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서구의 꼬뮨과 유사한 두레, 계, 보(寶), 도(徒), 접(接), 모꼬지 등 다양한 이름 아래 공동체 조직이 존재해 왔다. 촌회, 향회, 촌계, 동계는 한국이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자치공동체로서 면면히 그 기능을 이어왔다. 공동체가 남김없이 해체되고 만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명맥이 남아 있는 곳이 더러 있을 정도이다. 전통 농업사회는 공동체 노동이 없으면 유지가 불가능한 지역공동체 사회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내내 소작권은 영소작권(永小作權)이라고 불릴 정도로 양반지주라고 함부로 소작권을 옮기지 못했다. 소작료도 3~4할이 보통이었다. 양반 지주의 농사일을 거부할 수도 있는 두레라는 막강한 공동체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극심한 천재지변이나 관리들의 탐학, 전쟁이나 민란과 같은 격변기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조선시대 마을에서는 굶어죽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두레 공동체의 단위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의 리와 동이다. 두레 공동체와 함께 마을공동체에는 공제와 친목을 겸한 각종의 계(契)가 있었다. 씨족끼리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직한 종계(宗契), 혼인과 상을 치르기 위한 혼상계(婚喪契), 상포계(喪布契), 상여계(喪輿契), 경제적 곤란을 타개하기 위한 호포계(戶布契), 농기구 마련을 위한 농구계(農具契), 같은 나이 친구들끼리 서로 돕는 갑계(甲契) 등이 존재했다. 한국의 공제조합운동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한국에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이식된 것은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이후였다. 한국에서 이른바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공제 조직이 처음 조직된 것은 1903년 6월 20일 서울에서 설립된 공제회가 최초이다. 1876년 2월 조선이 일본과 강제로 맺은 강화도 통상조약은 일본이 조선에서 누릴 특권만 명문화하고 조선이 주권을 포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없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화폐의 유통, 일본인 범죄에 대한 영사재판권의 허용 등을 담고 있었다. 조선은 이후 이같은 무관세권 허용으로 말미암아 급속하게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값싼 상품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일본은 한전시세(韓錢市勢)라는 화폐조작을 통해 조선화폐제도의 붕괴를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 화폐인 백동전과 상평통보를 대신하는 일본 제일은행권, 그 중에서도 종이 어음의 농간은 쉽게 말해 오늘날의 환투기와 똑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동순태(同順泰)라는 청나라 장사치는 동순태상표(商票)라는 종이 쪼가리 어음을 발행하여 백가지 재화를 농락했다고 매천 황현이 울분을 토하며 기록할 정도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능한 조선 정부와는 별도로 민간에서 스스로 나서서 이같은 제일은행권과 동순태상표의 이용을 배격하고 조선인들이 뭉쳐 서로 도와 조선 화폐를 사용해서 조선경제를 지키고자 하는 공제회 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한국의 공제조합운동은 일본을 통해 서구 문화와 문명이 소개되면서자연스럽게 일반 인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우리에게도 서구의 코뮨과 같은 지역 자치공동체, 노동공동체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공제조합 조직은 그 숫자도 많고 역사도 오래 되었다. 수협공제는 1937년부터, 농협공제는 1961년, 신협공제는 1987년, 새마을금고공제는 1991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1948년부터 시작된 교육시설재난공제, 1963년부터 시작된 건설공제 등 조합 공제의 역사도 긴 편이다. 그러나 이들 공제 조직들은 민간 스스로 만든 자립 자치의 공제조직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인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법률에 따라 만든 관제조직에 가깝다. 주로 대학에 설립돼 있는 의료공제 조직들도 학생들과 교직원에 대한 복지 차원의 공제로서 공제회비를 대학등록금과 함께 걷기 때문에 존재조차 제대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많은 기업체와 단체들에 조직된 상조회 또한 상조회 혜택의 범위도 그리 크지 않고, 그저 기업과 단체에 소속된 부속기관 같은, 일종의 사내 복지 차원의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60년 가톨릭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인민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한 한국의 신협운동은 민간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였다. 신협운동은 조합원의 강한 유대를 최우선으로 삼은 협동조합 결사체운동과 사업체운동의 모범사례였다. 한국 신협운동은 철저하게 지역 결사체를 기초로 신용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신규 조합원은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만 조합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협동조합 교육은 모든 신협이 중시하는 핵심 사업이었다. 당시 신협의 업무는 1972년 신협법 제정과 함께 적금을 취급하기까지 거의 대부분 출자와 대부였다. 대부 이자는 3% 이내였다. 1967년의 경우 당시 출자배당율은 평균 8.3%로 은행의 적금 이율보다는 낮았지만 조합원들은 자부심을 갖고 출자했다. 신협운동은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서민의 고리채 척결에 크게 기여했다. 신협운동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여서 1982년에 이미 총자산규모 31억266만 달러로 세계 4위, 아시아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규모화, 합리화란 이름 아래 신협간 합병과 인수 작업이 진행되면서 한국의 신협운동은 결사체 정신을 버리고 사업체로서의 성장에만 주력하게 된다. 그 결과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6백여 개에 달하는 신협이 문을 닫게 된다. 살아남은 신협도 국가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으면서 금융감독 당국에 목줄을 잡힌 채 제2 금융기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에서는 결사체 공제조합 운동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의 공제조합 운동은 자활공제협동조합과 한겨레두레공제조합 등의 활동과 함께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보험을 대체할 만한 공제사업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60여 개에 이르는 법정 공제 조직 이외에 민간의 공제 조직은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특히 일반 기업과 각종 사회단체의 다양한 상조회는 애경사를 중심으로 일정한 소액을 상조금으로 지불하는 일종의 친목 결사체 공제 조직으로서 그 수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이외에도 경희대, 고려대, 서울대, 숙명여대, 연세대, 인하대, 전남대 등 의과대학이 있는 전국의 주요 대학에는 대부분 의료공제회가 있다. 대학 의료공제회는 학생과 대학 임직원, 교수 등 대학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학생들의 경우 등록금과 함께 1~2만원의 의료공제회비를 내면 질병과 부상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외에 이주노동자 의료공제조합,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공제회도 있다. 자활공제협동조합은 지역자활센터(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실업, 기술, 자금부족 등의 이유로 일할 기회를 찾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안정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보건복지부 예산 지원의 민간위탁기관)에 참여하고 있는 수급자와 차상위층, 지역의 저소득층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협동조합과 공제조합을 합한 성격의 조직이다. 조합원이 내는 출자금으로 학자금, 전세계약금, 의료비 등 주로 긴급한 생활자금이 필요할 때 신용 대출을 해주는 사업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공제조합이라기보다 신용협동조합이다. 사업의 목표를 사망, 질병 등의 어려움에 처한 조합원을 협동으로 돕겠다는 상호부조 운동에 두고 있고, 장례 공제사업을 준비하면서 자조운동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공제협동조합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저소득층 주민들은 담보나 신용관계상 제도금융권을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오히려 급전이 필요할 때는 형제나 이웃에게조차 돈을 빌리기도 어렵기 때문에 신용카드나 고리대부업자 등 고율의 이자를 지불하면서 돈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자활공제협동조합은 급속도로 전국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2010년 6월 자활공제협동조합연합회가 결성된 이래 지금까지 지역 자활공제협동조합이 조직된 곳은 약 70여 개에 이른다.   장례문화의 급격한 변화 한국의 장례문화는 불과 10년 남짓 사이에 너무나 급속하게 바뀌어 버렸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대도시 아파트에서도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장례식을 지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집에서 장례식을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례식 장소의 변화   병원 전문장례식장 집 성당 교회 절 1994년 22.6% 0% 72.2% 2.4% 1.4% 0.5% 2005년 68.8% 20.7% 6.9% 1.8% 1.5% 0.3%* 2006년 3월 13일 한국갤럽 발표자료   위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94년에는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집에서 장례식을 지냈다. 고인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삶을 마치고 고인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는 바로 그 방에 가족들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고인을 기렸다. 그런데 10년이 조금 지난 2005년에는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병원이나 전문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집에서 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채 되지 않게 바뀌고 말았다. 매장과 화장에 대한 인식도 10여년 사이에 화장 선호로 급속하게 바뀌었고, 2014년에는 10명 가운데 8명이 화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 2006. 3. 13. 한국갤럽 발표자료   이런 급격한 변화의 요인은 많다. 가족 형태가 급속하게 핵가족화하면서 주거문화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뀐 것도 한 요인이라고 분석된다.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비율   단독주택 아파트 1970년 88.4% 4.1% 1990년 46.1% 35.1% 2005년 19.85 54.3%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례문화의 변화는 공동체의 해체와 극도로 파편화된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이 주요인이다. 극단의 서구 근대 산업화만을 추구한 결과 극단의 시장경제, 상품경제 속에서 사람을 오직 이윤을 낳아주는 노동력으로만 보는 경제제도가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삭막한 풍조는 고스란히 장례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죽음과 주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시장경제가 진리처럼 확고부동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의 장례 문화는 모든 분야가 상품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압축 성장과 함께 압축 상업화가 장례문화를 단기간에 압축 변형시켜 버린 것이다. 공원묘지도 화장장 납골당도 장례식장도 음식도 염습 서비스도 수의, 관 등의 장사물품도 모두 이윤을 위한 장사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장례문화의 상업화는 급기야 장례사업을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신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죽음의 장사’로 변질시켜 버렸다. 다단계 불법 영업이 횡행하고 어떻게 하든지 상주들로부터 추가 비용을 지불하게끔 만드는 교묘한 일종의 사기 영업도 고착화되었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르면서 상주와 상주 가족들은 불신에서 시작해서 불신으로 끝나는 아주 불쾌한 장례식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다. 장례사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묘지와 화장-납골당 분야, 장례식장과 음식, 염습과 수의, 관 등 장사물품과 서비스가 그것이다. 한국의 장례식 비용은 대략 1천만~1천5백만원가량(서울의 경우) 든다. 지역마다 편차가 있지만 장례식 전체 비용 가운데 이 세 분야의 비용이 각각 대략 3분의 1씩 차지한다. 이 세 분야 모두 다양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어느 순간 일반 시민들이 병원 장례식장을 편리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현실의 여러 요인 때문에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일부 병원에서는 장례사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해서 앞다투어 불법으로 장례식장을 만들어 버젓이 영업 행위를 해왔다. 이렇게 수십년 간 병원 장례식장은 불법이었다. 2010년 초에 이르러 법이 바뀌어 기존의 병원 장례식장들만 비로서 합법화되었다. 상조사업은 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부터 수입되어 주로 부산경남 지방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상조회사들은 일종의 선불식 할부거래업으로 회원으로부터 매달 일정액을 불입 받고 회원들의 장례식 행사를 대행해 준다. 상조회사들은 장례식 영역 가운데 염습 등 장사서비스와 수의, 관 등 장사물품을 상품화시켰다. 이 상조회사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다단계 영업을 하기 시작했고, 고객들이 낸 납입금의 50% 이상을, 심지어는 90%를 영업비용으로 지출하는 사기 영업을 일삼아 소비자들의 피해가 급증하면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해약을 해도 해지환급금을 전혀 주지 않거나 상이 발생해서 서비스를 받으려고 상조회사에 연락했는데 이미 그 상조회사는 망해서 없어졌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행히 2010년 9월부터 개정 할부거래법이 시행되어 규제를 강화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상조사업은 일반 시민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장례업의 가장 큰 핵심 문제는 음성의 뒷돈(리베이트) 거래 관행과 수의, 관 등의 폭리 구조이다. 이것이 장례사업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갖고 있는 불신의 원천이다. 상을 치르고 나서 공공연히 요구하는 봉투(뒷돈)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중에 뒷돈(리베이트)과 리베이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장례식 곳곳에 뒷돈(리베이트) 관행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 데가 없다. 보통 장례식 비용 전체의 20~40%가 뒷돈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협동)조합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2010년 1월에 출범하여 현재 장례공제라 할 수 있는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고, 곧 혼인계를 운영할 예정이다. 상포계는 농업 공동체에서 초상 때 드는 천을 마련하기 위한 계모임이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전국 15개 지역의 지역 한겨레두레공제조합과 이들 지역 조합이 연대해서 만든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가 결성되어 임의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 발효 이후에는 임의단체인 한겨레두레공제조합과는 별도로 협동조합 법인격을 새로 조직하고 동시에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를 조직해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 한두레의 상포계 는 장례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협동조합 사업의 성격과 상호부조 활동이라는 공제조합 결사체의 성격이 병존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2009년 4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가 창립 기념 심포지움 ‘경제를 넘어 공제로: 한국 상조사업의 현황과 대안’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된 상조회사의 다양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업적 장례문화를 공동체 장례문화로 바꾸는 근본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2009년 9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으로 공제조합 운동을 해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때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주민운동을 비롯해서 협동조합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지역공동체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역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준비위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13일, 대전 민들레의료생협 교육실에서 13개 지역 한두레준비위 활동가들이 모여 총회를 갖고 13개 지역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준비위와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준비위를 정식 결성하였다. 2010년 2월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공식 출범을 선언하고 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사물품과 장사서비스 제공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돼 즉시 조합원 모집을 중단하고 재점검하는 기간을 가졌다. 근 8개월 동안 뒷돈(리베이트)과 폭리구조 근절의 시스템으로 전면 개편하면서 2010년 10월 말부터 조합원 모집을 다시 시작했다. 임의단체로서 한겨레두레 상포계 사업을 하면서 가장 큰 현안으로 대두된 것은 법인격 취득 문제였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총회의 치열한 논의 끝에 한겨레두레 상포계는 생협 법인으로 등록하기로 결정하였다. 생협법상 법인 설립 인가 조건은 3백명 이상의 조합원과 3천만원 이상의 출자금이었다. 서울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조합원이 3백명을 넘어서고 출자금이 3천만원 이상이 되면서 2011년 5월 3일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법인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바로 서울시에 생협 법인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근 4개월에 걸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할부거래법의 선불식 할부거래와 유사수신행위법 적용 여부에 대한 검토 과정이 있었다. 유사수신행위법 적용 여부는 한두레 상포계의 조합비 적립이 원금 이상의 금액을 지불할 것을 약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선불식 할부거래업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와 다소 긴 논의와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공정위에서는 선불식 할부거래업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최종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런데 서울시는 2011년 9월 20일 서울한두레생협의 설립 인가 신청을 반려하는 공문을 보내왔다. 생협법상 사업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공정위의 유권해석에 따라 내려진 조처였습니다. 서울한두레와 연합회는 자문 변호사에게 법률 검토를 의뢰하고 생협연합회와도 대응책에 대해 협의를 했다. 2011년 말부터 2012년 초까지 서울한두레와 한두레연합회에서는 각각 이사회와 총회를 열어 생협 법인 인가의 재신청을 놓고 논의를 계속했다. 당시 협동조합기본법 논의가 막 시작되고 있던 때였다. 2012년 초, 결국 생협의 재신청보다는 협동조합기본법의 제정을 지켜보고 방침을 정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2011년 12월 29일 협동조합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제정되었다. 이어 11개월 뒤인 2012년 12월 1일 비로소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었다. 서울조합부터 협동조합 법인 창립대회를 다시 열어 설립신고를 하고 법인격을 취득했다. 이로써 한겨레두레 상포계 사업은 현행 법을 준수하면서 협동조합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물신숭배의 풍조에 젖어 죽음마저도 상품으로 거래하고 있다. 한겨레두레 상포계는 이런 상품화를 지양하고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 장례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실천해 나가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상포계 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가고 있다. 홀로죽음을 마을장례로 치르기 위한 상포계 나눔사업을 서울시․종로구와 함께 2년째 진행하고 있고, 상업화된 장례를 마을공동체 장례로 바꾸기 위해 ‘작은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혼인계를 비롯해서 돌잔치계, 팔순잔치계, 혼인계, 여행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또 의료사협, 가사노동자협회, 공동육아과 공동체교육, 돌봄 등과 함께 사회서비스협동조합협의체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사회서비스와 복지분야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댈만한 어떤 공동체도 없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사회, 사막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힘없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흩어져 폐기물처럼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애경사와 같은 큰일이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자 우리 스스로 만든 결사체이며,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지역의 사회안전망이다.   상포계의 특징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상포계는 이런 뒷돈(리베이트)과 장사물품의 폭리구조를 과감하게 없애버렸다. 그래서 장례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고 리영희 선생, 허병섭 목사, 김근태 장관, 장준하 선생, 이내창 열사, 홍근수 목사의 민주사회장을 비롯해 지금까지 500여건의 장례를 훌륭하게 치르면서 장례문화를 혁신하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포계는 무엇이 다른다. 상조회의사 대표격인 A상조회사의 360만원짜리 상품 원가는 화장의 경우 약 14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포계는 장례물품과 인력서비스를 원가로 조합원들에게 제공하고 여기에 24%의 조합운영비만 붙인다. 이렇게 하여 수도권의 경우 조합원에게 최소한 150만원 이상의 직접 장례비용을 절약한다. 거기다 납골당 리베이트를 비롯한 각종의 봉투를 없애고, 특히 장례식장의 주수입원인 음식비를 절약하면 최소한 2, 3백만원 이상을 절감할 수 있다. 협동조합의 힘은 신뢰의 인간관계입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상포계는 같은 조합원이자 상포계 활동가인 전문 장례일꾼(장례지도사)과 접객관리사(도우미)에 장례를 맡기기에 믿을 수 있다. 유족에게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까를 고민하는 상조회사와는 근본부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포계 운영원칙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상포계는 일반 상조회사들의 상조상품과 달리 장례물품과 인력서비스를 원가 그대로 제공합니다. 즉, 매장과 화장(납골당), 장례식장, 음식, 그리고 염습과 장사물품(상조상품 영역) 등 장례식 전체 진행을 직거래의 공동구매를 통해 조합원에게 제공한다. 조합원의 조건에 맞추어 상을 치르는 이런 맞춤형 장례식은 다음과 같은 상포계의 운영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첫째, 리베이트 근절. 상포계는 일체의 뒷돈(리베이트)를 받지 않는 투명한 장례식 진행을 가장 큰 원칙으로 한다. 뒷돈을 받은 것이 드러날 경우에 조합원 상주에게 뒷돈이 거래된 분야의 비용 전체를 배상하고 장례일꾼(장례지도사)은 즉각 제명조치 된다. 둘째, 장사물품 폭리 구조 배제. 수의, 관, 생화제단, 장의차 등에 도사리고 있던 속임수나 폭리 구조를 말끔히 제거해 비용을 대폭 줄인다. 추가되는 발생하는 비용 또한 마진 없이 그대로 조합원에게 제공한다. 셋째, 맞춤형 장례식 진행. 조합원에게 상이 발생하면 상포계의 장례일꾼(장례지도사)은 한 시간 이내에 즉시 출동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바로 상주 가족과 장례식 전체를 협의한 뒤 계약서를 작성하고 장례식을 진행한다. 조합원 상주 가족이 장사물품의 목록을 보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적합한 물품을 맞춤형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상주인 조합원이 미리 준비해 둔 수의가 있다면 구입하지 않으면 되고, 접객관리사(도우미)도 필요한 만큼만 쓰면 되는 것이다. 넷째, 출자금과 24% 조합비.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려면 1구좌(1만원) 이상의 출자금을 내야 하고 이는 탈퇴나 해약시 전액 돌려준다. 또 상포계를 이용하기 위해 매달 3만원의 조합비를 내며 이중 24%는 조합운영비로 사용한다. 개별 정산은 해약과 탈퇴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소비자생협 운영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마진을 남기지 않는 비영리 구조이다. 다섯째, 조합원 교육. 상포계 조합원은 가입 시 반드시 조합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조합원 교육을 받아야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장례사업의 현실과 상포계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조합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며 실제 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출처: tvn작은장례와 품앗이 마을장례 장례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저출산과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2035년에는 전체 2천200만 가구의 68%가 1~2인 가구이고, 65세 이상 900만 가구의 80%가 1~2가구가 될 전망이다. 고령 1인가구는 2015년 172만명, 2035년 409만명으로 고령화와 홀몸가구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망자는 가파르게 늘어나는데 이를 감당할 인구(자손)의 수는 감소한다는 뜻이다. 이제 빈곤에 이어 인구가 큰 문제로 닥치게 되는 것이다. 장례업계에서는 이러한 ‘시장의 확대’에 반색하고 있다. 대형병원 장례식장은 시설을 더욱 확장하고 상조회사들은 화려한 장례식을 통해 비용을 높이고 있다. 그러면서 이른바 엠엔에이를 통해 갈수록 대형화 고비용화 독과점화로 치닫고 있다. 이제 돈이 없으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한많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살아서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다 죽어서까지 홀대 받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작은장례’유일한 대안이라고 보고 2015년부터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다. 작은장례는 병원 장례식장과 전문 장례식장을 이용하지 않고 공공의 장소나 가정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혼례와 마찬가지로 장례도 전문예식장소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이 짜놓은 시스템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한번 상상해 보라. 고인이 평소 자주 드나들던 마을회관이나 노인회관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공공의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의료사협의 병원이나 생협 등 협동사회경제 진영의 공간, 마을공동체와 네트워크, 절 교회 성당 등 종교시설, 마을회관이나 노인회관, 문화센터와 종합사회복지관, 지자체의 공간 등 장례식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데이터베이스화 하고 작은장례 신청자와 연결한다. 장례는 전문 장례식장이 아닌 집이나 공공장소에서 장례를 치러본 경험이 있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진행한다. 시신을 작은장례 장소로 모시기 어렵다면 병원 안치실에 둘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장례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녹색장례, 문화장례, 마을장례가 가능해진다. 작은장례는 녹색장례이다. 작은장례를 치르면 무엇보다 일회용품과 음식물 쓰레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미래세대를 위해 지구환경을 잘 보존해서 물려주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수의대신 평상복을 입을 수 있고, 나무관 대신 종이관을 쓸 수도 있다. 꼭 3일장일 필요가 있는가. 1일장이나 2일장, 대규모 장례가 아닌 소규모 장례로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작은장례는 진정한 자연장인 산골(散骨)을 실현한다. 현재의 자연장은 자연장이 아니라 ‘인공장’이다. 왜 그런가. 1998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화장률은 채 30%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2014년 전국 화장률을 잠정해본 결과, 그때의 배를 훌쩍 넘어 거의 80%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누가 뭐래도 우리 국민들의 보편적인 장법은 화장(火葬)이 되었다. 화장한 유골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화장한 뼛가루를 자연 속의 산 강 바다에 뿌려줌으로써 단기간에 자연에 환원시키는 산골(散骨)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 법률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규정도 내리지 않고 있다. 국립해양연구원에 따르면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것으로 인한 오염이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생물독성 또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에 1천구의 유골을 바다에 뿌려도 부영양화 가능성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날 자연장(수목장림)의 신속한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주장의 조속한 관철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또 그들은 독일의 프리드발트, 그것도 경영을 쳐다보았을 뿐 그들 장례문화에 대한 세심한 관찰, 법제도와 역사 철학과 같은 본질적인 면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한 바와 관련이 없는 공공성이 강한 다른 형태의 자연장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오직 신속한 도입에만 총력을 쏟았고, 공영방송에서조차 수목장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그 과정에서 수목장 열풍이 불어 전국 도처에 무허가 수목장 난립이라는 혼돈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다수 국민들은 수목장이 곧 자연장이라 믿게 되었다. 자연장이라는 말의 뉘앙스 때문에 전통적인 산골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유골을 뿌리는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좀 깊이 들여다본 외국의 자연장은 그 사회의 가족구조의 변동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장법이었다. 때문에 이를 우리의 장법으로 도입하기 위해 보다 많은 연구과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의 자연장은 이처럼 조급함과 미성숙한 데서 출발했고, 때문에 시행착오는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수목장 열풍 속에 중앙과 지방정부들이 나름 열심히 뒤쫓아 갔던 결과물이 바로 공설자연장지였다. 박태호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 전국의 자연장지를 조사하고 나서 ‘과연 이것이 자연장지인가, 인간장지 아닌가?’라고 개탄한 바 있다. 예전에는 경제적인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산에 유골을 뿌렸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강산을 운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사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수산 자연장은 우리 조상들도 많이 사용하던 훌륭한 장법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작은장례는 문화장례이다. 보여주기식 의전중심의 화려한 장례에서 진정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소박하고 품격 있는 장례를 치를 수 있다. 상조회사의 의전서비스는 도를 넘고 있다. 밴드, 화려한 꽃장식, 제복 등 국적불명의 장례문화와 허례허식은 고인이 아닌 고인의 가족을 위한 장례로 만들고 있다. 작은장례는 진정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장례이다. 고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가서 절하고 비싸지만 질은 형편없는 ‘육개장’ 한 그릇 먹고 오는 천편일률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장례가 아니다. 추모영상 상영, 추모시 낭독, 추모 연주, 조문보(고인의 약전과 유족 소개, 장례 절차), 회고담 나누기 등이 가능해진다. 작은장례는 마을장례이다. 얼마전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는 ‘집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한 조합원이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요청한 것에 따른 것이다. 그 어머니는 생전에 “통조림 찍어내듯 장례를 치르는 병원 장례식장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조합원은 새로 긴 천에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새기고 ‘Good bye my mom, 엄마 사랑해’라고 적었다. 이 특이한(?) 플래카드를 보고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이구, 이집 할머니 돌아가셨네’라고 하면서. 고인이 생전에 살던 곳에서 장레를 치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 평소 가깝게 지냈던 이웃이 함께할 수 있다. 음식은 인근 식당에서 만들어 날라왔다. 병원 장례식장의 비싼 음식의 절반에도 못미치지만 맛과 질은 훨씬 뛰어났다. 동네사람들은 조문객이자 유족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고 상을 차렸다. 이 조합원뿐 아니라 어떤 조합원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렀다. 병원장례식장만이 유일한 장례방식이 아니며 제3의 장소에서도 충분히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개념 있는 선택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년 전부터 서울시․종로구와 함께 마을장례지원단 ‘따뜻한동행’을 운영하고 있다. 관내의 무연고, 홀몸어르신을 위해 적십자병원, 나눔과나눔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홀몸어르신들 중에서 장례를 치를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정부에서 지원하는 장제비 이외의 비용을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나눔기금’에서 지원한다. 장수사진 찍기, 구술생애사 기록, 엔딩 노트 제작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죽음을 걱정하던 노인들이 큰 시름을 덜었다며 웃음을 되찾는 모습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무연고 시신을 장례 절차 없이 바로 화장하고, 가난한 이들은 천대받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죽음을 성찰하면 삶이 존엄해진다. 결론적으로 작은장례는 가난한 이들의 싸구려 장례가 아니라 개념 있는 이들의 미래와 후손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자 위대한 결단이다.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빠른 속도로 바꾼 경험이 있다. 이제 화장에서 작은장례로 나아가야 한다. 화장과 자연장으로 장법을 바꿨으니 이제 예식을 바꿔야 한다. 언제까지 장사꾼들의 교묘한 사탕발림에 놀아날 것인가. 김경환 /서울조합. 연합회 상임이사      

    관리자 작성일: 2015-11-13 조회:2,341

    협동조합은 ‘사람꼴’ 보는 운동

                                                                          이춘숙 서울조합 이사이춘숙 서울조합 이사는 평생 노동운동과 주민운동 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다. 작고 다부진 체구에서 단련된 ‘투사’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운전대를 놓지 않고 과천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의 권리와 자립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그가 금쪽 같이 귀한 말씀을 풀어놓았다.

    관리자 작성일: 2015-10-29 조회:1,529

    제걀량, 북면(北面)하다

                                                                       배한호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 다움한의원 원장)                                                                                     삼국지,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걀량(공명)은 신단(神壇)을 만들어 천지신명께 기원을 드렸다. 중원의 삼국분할이라는 시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본인의 명(命)을 연장하고자 하였다. 하늘(천 天)에서 정해놓은 본인의 수명을 알았던 제갈량은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 천지자연 삼라만상 주재자(신 神)에게 간절한 염원을 담아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다.   신단은 직사각형으로 제작되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도록 제작되었다. 제걀량은 남쪽 계단을 밝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 신단의 상단에서 북쪽을 보며 제를 올렸다. 제걀량은 왜 북쪽을 보며 제를 올렸을까 왜 천지에 가득한 신(신명 神命) 중 하필이면 북쪽에 절을 하며 생명연장의 꿈을 꾸었을까 제걀량은 왜 북면했을까?                                                                                   요여(영거) 한겨울 해가 지고 나면 어두운 북쪽 하늘에 거대한 짐승이 머리를 내밀고 나타난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이 짐승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라 동이 틀 무렵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이 짐승은 북극성을 끼고 반원운동을 한다. 해가 질 무렵에는 북쪽 지평선 위 산등성이에서 몸을 반쯤 내밀며 북극성 좌측에서 올라오다가, 자정이 되면 북극성 바로 위를 날다가, 해가 뜰 무렵에는 북극성 우측으로 내려서 땅으로 들어간다. 겨우내 낮 동안은 땅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한여름 해가 지고 나면, 어두운 북쪽 하늘에 거대한 짐승이 엉덩일 치켜들고 땅에 머릴 박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이 짐승은 북극성 우측에서 땅으로 곤두박질 칠 준비를 한다. 자정이 되면 없어졌다가 동이 틀 무렵 다시 북극성 좌측에서 머리부터 솟아오른다. 우리 눈에 관찰되지는 않지만 여름철에는 낮 동안 북극성을 좌측에서 상승해서 솟아오르고, 정오 무렵 북극성 바로 위를 날다가, 밤이 되면 우측으로 하강하여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짐승은 겨울에는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만들고 여름에는 낮 하늘을 날아다니며 더운 여름을 너무 덥지 않도록 조절해준다. 이 짐승은 곰이다. 북두칠성인 큰 곰 자리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한다. 임금 자리인 자미원 북극성을 하루 종일 수호하는 것이다. 임금의 자리, 세상의 주인인 북극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별자리다.   하늘 임금이 북극성이듯 땅 임금은 인간왕이다. 북극성이 북쪽하늘에서 남쪽을 바라보듯, 왕은 북쪽 높은 단에서 신하를 향해 남쪽을 바라본다. 이를 남면(南面)한다고 한다. 인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죽지 않는 영원불멸의 하늘의 왕 북극성을 향해 북면(北面)하게 되고 땅의 왕에도 북면하게 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것을 ‘북면한다’라고 하고 임금이 신하를 대하는 것을 ‘남면한다’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수명이 정해진다고 보았다. 그 수명을 정하는 것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이다. 남두육성은 생일(生)을 결정하고 북두칠성은 사일(死)을 결정한다. 아기를 점지해달라고 빌 때는 자정 무렵 정화수를 떠 놓고 남쪽을 향해 남두육성을 향해 기원하고, 더 살게 해달라고 빌 때는 북쪽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향해 기원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북극성을 향해 인간도 북극성처럼 영원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인간세상 삼라만상의 지존인 천지자연의 주인 북극성에 제걀량은 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원을 한 것이다.                                                                                                    백제대향로인간은 누구나 제걀량처럼 북면하고자 한다. 지금의 북극성은 대형병원이다. 기도와 기원 대신 연명(延命)치료를 한다. 제걀량은 스스로 원대한 꿈을 꾸며 북면했으나, 지금의 북면인 연명치료는 그렇지 못하다. 현재 연명치료는 본인과 가족의 의사와는 상당부분 무관하게 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크다. 죽어야 될 때 죽는 것이 천명(天命 하늘이 내린 명)이지만 현실은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연명치료는 생명연장의 꿈을 꾸어왔던 인간들이 만든 일종의 대규모 신단(神壇)이다. 대표적인 연명치료의 일환은 말기암환자들에게 시행하는 심폐소생술이다. 조선닷컴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 암 사망자 스무 명 중 한 명이 마지막 한 달 사이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다. 5년 새 약간 줄었지만(6.8%→5.4%) 여전히 사람 수로 따지면 한 해 4000명에 육박하는 수치라고 한다.   심폐소생술은 중요한 치료술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40-50대 남자사망의 주요원인이 급성심정지다. 이런 경우 심폐소생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연 말기암환자에게 필요한 시술일까? 심폐소생술은 흉곽을 강하게 압박을 하게 됨으로 시술 후 대개 2-3개의 갈비뼈가 골절될 수 있다. 말기암환자들의 경우 소생이 되더라도 오히려 골절후유증으로 또 다른 고통을 감내해야한다.   심폐소생술을 말기암환자에게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외로 관행과 타성으로 볼 수 있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보호자와 우선 상담을 한다. 만약 악화되시면 심폐소생술을 하실 건 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물론 젊은 환자분이 갑자기 심정지가 일어날 때는 당연히 보호자 동의가 없더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연세가 들고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의 경우 심폐소생술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을 가중시킨다. 대개 보호자분들과 상담을 해보면 결론은 대동소이하다. 부모님 연세가 많으면 심폐소생술을 바라지 않다가도 막상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기 직전이 되면 상담했던 보호자가 다시 입장을 바꾸어 심폐소생술을 해달라고 하거나 다른 보호자가 나타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한다. 그러면 의료진은 개인적 판단으로는 필요 없다고 생각되지만 심폐소생술을 해야 한다.    의학적으로 볼 때 무의미하게 생각되던 수많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던 기억이 있다. 시행하는 그 순간에도 환자의 고통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료법 때문이다. 만약 의사가 주도적으로 보호자를 설득해서 심폐소생술을 안할 수도 있지만 설득이 안 된다면 보호자에 의해 의사가 법정 책임을 질 가능성이 생긴다. 또한 심폐소생술을 포기한 보호자도 불효자가 되기 쉽고 다른 가족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조선닷컴에 따르면 2013년 7월 31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국가생명심의윤리위원회에서는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이나 가족의 결정에 따라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권고안을 확정하고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고 한다. 2015년 5월 22일에는 관련 국회 공청회가 열렸고, 28일에는 모 의원실에서 “연명치료 중단 절차 등을 담은 ‘임종과정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일명 존엄사법)을 다음달 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제걀량은 본인의 연명을 본인이 결정했다. 질병없이 저절로 찾아올 명(命)의 다함에, 큰 뜻을 세상에 관철시키고자 그 주어진 명을 거역하고 거부하고 연명하고자 하늘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제걀량도 무의미한 지금의 연명치료에는 반대할 것이다. 이제 다 같이 연명(延命)의 신단에서 내려왔으면 한다. 연로하여 홀연히 북망산(北邙山)으로 훌쩍 떠나는 것은 얼마나 멋있는 삶의 마무리인가?      

    관리자 작성일: 2015-09-25 조회: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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