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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메멘토 모리> 문득, 집에 대한 생각 2019-07-23 17:48:55
    대표이미지 20190723_172553862.jpg (file size 211KB)
    작성자 handurae
    조회 502

    문득, 집에 대한 생각

    봉준호 감독에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 <기생충>의 네 식구는 ‘반지하’에 산다. 반지하는 지하와 지상에 반쯤 걸친 공간이다. 온 가족이 백수인 그들이 사는 곳은 ‘집’이 아니라 일종의 ‘서식처’에 가깝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고, 서식처는 동물이 사는 곳이다.

    사람도 움직인다는 점에서 동물이긴 하나, 일반적인 동물과 다르기에 벽체와 지붕, 문짝만으로 집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개집과 인간의 집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금세 알 수 있다. 개집에는 소파, 양변기, 샤워시설이 필요 없다. 직립하고 말을 하며 옷을 걸치고 음식을 조리해 먹는 인간의 삶은 의외로 복잡하며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창궐, 공생하고, 취객이 창문을 향해 느닷없이 오줌을 싸갈기며, 큰비라도 내릴라치면 개수대와 양변기가 역류해 똥물과 오물이 범람하는, <기생충>의 식구들이 사는 그 곳은 인간이 사는 집이라 부르기에는 턱없이 미흡하고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장소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그 식구들은 ‘제대로 된 집’을 열망하다 기회가 오자 아주 변칙적인 방법으로 그 집을 점거한다. 그리고 힘없고 가난한 ‘기생충’의 운명이 그렇듯 결국 비참하게 추락하고 만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반지하’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대낮에도 전깃불을 켜지 않으면 천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습하며 하수구 냄새가 났다. 경기도 성남의 제지공장에서 일하던 그때, 철야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이면 이불이 축축했다. 젖은 이불 속에서 자고 났을 때, 내 몸은 스펀지 같이 무거웠다.

    어느 날 습기를 흠뻑 머금은 이불을 옥상에 널고 출근했다. 그날은 하필 오후부터 장대비가 내렸다. 그날 역시 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데 덮고 잘 이불이 없었다. 맨바닥에 누워 밤새 눈을 떴다 감았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다른 방도 기억난다. 울산의 어느 공단지역이었는데, 보증금 없는 월세 3만 원짜리 단칸방이었다. 성인 남성 둘이 누우면 딱 맞을 공간이었다. 0.75평짜리 감옥의 독방과 흡사했다. 그곳은 흡사 ‘관짝’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곳에 가재도구라고는 벽에 붙은 옷걸이가 전부였다.

    화장실도 샤워실도 공용이었고, 관짝 같은 방에서 50보 이상 떨어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나와 비슷한 인생들이 모두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알전구가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알몸을 씻고 있는데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흘깃 바라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방 혹은 집에 얽힌 기억은 더 많이 이어진다. 반지하에서 빌라로, 작은 아파트로…. 돌아보면 슬프고 참담하며 괴로운 시간이다. 반지하 신세는 진작 면했지만 아직도 무주택자 신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뒤늦은 나이에 맹렬하게 집에 관심을 두고 있다. 환갑을 바라보니 주거의 안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서울 강남의 요지에 위치한 비싼 아파트, 돈 되는 집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전통시장이 있고, 산이 있고, 햇별이 잘 드는 집이면 좋겠다.

    쓰고 신 세월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방과 반지하와 주택을 거쳤을까. 그래서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마천루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건물을 말한다. 도시가 마천루의 숲으로 급속히 변신해갈 때, 그 건물 안으로는 평생 들어가 보지 못할 이들의 가난과 결핍과 좌절의 시간은 여전하다. ‘제대로 된 집’에 살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 지상의 방 한 칸에 머물던 우리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고대광실, 대궐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권세를 누리던 이들도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삶은 그렇지 않지만 죽음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초라한 육신으로 숨을 거둔, 죽은 이가 도착하는 곳은 역설적으로 아주 작은 집이다. 그 작은 공간을 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아는 망자의 쉼터는 라면 상자처럼 작은 공간이거나 어두운 땅 속뿐이다. 때로는 허공이거나 바다에 뿌려져 흩어지기도 한다. 볕 잘 들고 공기 잘 통하는 명당자리에 왕릉처럼 거대한 봉분을 쓴다 해도 망자는 결국 한 평 땅에 놓여 있다 먼지로 흩어질 뿐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것이다.

    살 곳을 걱정하며 평생을 살던 이들도 죽을 곳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는 그가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에 걱정을 한들 달라질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때 사람이라는 동물이었던 존재는 한순간에 무기력한 유기물로 바뀌고 만다. 다양한 형태의 주거를 전전하던 우리들 최후의 거처는 결국 아무 곳에도 없다. 그래서 죽음만큼 큰 위로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작은 집에 머물다 조용히 자연 속으로 흩어져야겠다. 그것이 안식이다. ▣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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