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 — 전문 —
박태호씨(34)가 장례지도사가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취직이 안 되어 방황하고 있을 때 과거 운동권 시절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그 길로 상조회사에 입사한 박씨는 현장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가 들어간 데가 메이저급이었는데도 장례지도사 월급은 겨우 200만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600만~700만원씩 거뜬히 벌고 있었다. 수의·관·장의차 선정에서는 물론 하다못해 영정 사진사에까지 뒷돈(리베이트)을 챙기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물론 유족들은 이를 모른다. 그러니 ‘당하고도 고마워하는’ 기이한 코미디가 벌어진다.
이를 알게 된 박씨는 선배에게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운동은 접었어도 양심은 안 팔았다.” 그러나 어영부영 회사에 남아있게 되면서 그도 변해갔다. 망자가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1년6개월쯤 지난 어느 날, 선배와 통화할 일이 생긴 박씨는 무심코 “오늘 완전 개털이었어”라며 그날따라 벌이가 적었던 것을 하소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배가 불같이 화를 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초심을 잃고 변할 수 있느냐는 질책이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이대로는 인생이 망가지겠다고 생각한 박씨는 이튿날 상조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쪽 바닥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생각하고 다른 일을 찾았다. 그런데 4년 만에 마음을 고쳐먹을 일이 생겼다. 박승옥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한두레) 대표의 간곡한 설득 때문이었다.
박승옥 대표는 대안 에너지와 지속 가능한 경제를 주로 고민해온 1세대 시민운동가다. 그가 장례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9년. 상조회사의 횡포가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된 참이었다. 잇단 횡령 사고로 경영진도 줄줄이 사법처리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상조회사를 찾았다. 달리 대안이 없어서였다. 마을사람이 상을 당하면 온 동네가 십시일반 힘을 보태 장례를 함께 치르던 상포계의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장례 비즈니스였다. 그 결과 ‘돈 없으면 죽기도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이걸 바꿔볼 수는 없을까.’ 함께 머리를 맞댄 이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문규현 신부, 명진 스님 등이었다. 인천·부산·광주 등 13개 지역에 협동조합의 전신이라 할 한두레공제조합 준비위원회도 만들어졌다. 초창기에는 한겨레신문사도 업무협약 형태로 참여했다.
뜻은 좋았지만 시작은 지지부진했다. “상조산업이라는 게 알면 알수록 복마전 같은 구조더라. 이권이 워낙 크다 보니 조폭까지 연루돼 있었다”라고 박 대표는 말했다. 전국을 돌며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데만 반년 넘게 걸렸다. 이를 통해 얻은 결론이 ‘상조문화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였다. 어떻게? 바로 협동의 힘을 통해서였다.
핵심은 직거래 공동구매 방식이었다. 한 예로 일반 상조회사가 유족에게 권하는 40만원짜리 수의 원가는 4만~5만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원단이라도 7만~8만원 수준이다. 이걸 조합이 중심이 돼 도매상과 직거래하는 구조로 바꾸면 구매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실제로 상을 당한 한두레 조합원들은 품목별로 도매상 청구서를 보고 가격을 따져본 다음 자기가 원하는 물품을 선택하게 된다.
조합원 허필두씨(49, 공무원)는 지난달 모친상을 치르며 협동조합의 힘을 실감했다고 했다. 8년 전 부친상을 치를 때 허씨는 음식값으로만 1400만원을 지출했다. 빈소가 있던 강원도 원주에서 장지인 홍천까지 30㎞를 이동하는 데 쓴 리무진 비용만도 60만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쓴 음식값은 900만원 남짓. 서울에서 홍천까지 약 120㎞를 이동했는데도 리무진 비용은 40만원에 불과했다(대형버스 이용료는 45만원). 그 결과 이번에는 부친상 때보다 장례비용을 1000만원 가까이 덜 쓴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허씨 가족이 더 감동을 받은 것은 장례지도사였다. 장례 과정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염습도 정성스러웠다. 고마운 마음에 장례를 마치고 10만원을 수고비로 건넸더니 극구 사양한 끝에 이를 조합비로 적립하겠다고 했다. 장례지도사 또한 조합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장례지도사의 팀장 격인 박태호씨는 “과거 상조회사에 근무할 때는 유족 연락을 받고 출동할 때 ‘이번에는 뭘 팔아 남길까’ 궁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조합원 장례를 어떻게 하면 잘 치를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장례지도사 대부분이 상조회사 출신이라 수입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이제는 떳떳하게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겠다’라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뿐 아니다. 예전에는 돈이 안 남으면 화가 났는데, 지금은 조합원이 따지고 들면 화가 난다고 박씨는 말했다. ‘아니, 상포계처럼 좋은 방식으로 정성을 다해 정직하게 장례를 치렀는데 왜 몰라줘?’ 이런 야속함이 들어서다.
물론 협동조합이 초창기인 만큼 실무에서 아직 미숙한 점도 많다. 조합원 처지에서는 성가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관이나 생화제단은 반드시 자기네 것을 써야 한다고 우기는 장례식장이 여전히 많다. 이럴 때 상조회사는 그 요구를 들어주고 대신 다른 데서 뒷돈을 챙기려 든다. 장례식장과 상조회사 간 힘겨루기는 옛말이고 이제는 서로 담합하기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한두레의 경우 조합원 스스로 불공정한 관행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조합 가입 시 필수 요건인 조합원 교육에서 상조산업의 폭리 구조도 공부해야 한다.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은 ‘소비자’가 아닌 ‘주인’이기 때문이다.
3월 말 현재 한두레협동조합 조합원은 2000여 명. 조합원이 되려면 1계좌(1만원) 이상 최초 출자금을 내고 조합비로 매달 3만원씩을 내면 된다. 박승옥 대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조합원 숫자가 몇 만 명 규모에 이르면 상조산업 전반의 거품을 빼는 데 무시 못할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죽음조차 상품화되는 현실을 바꿔보고픈 열망도 있다. “고작 20년 전만 해도 10명 중 7명 이상이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72.2%). 그런데 지금은 10명 중 9명(89.5%)이 병원이나 전문 장례식장을 이용한다. 아무리 사회가 급변해도 통과제의와 관련된 문화는 잘 바뀌지 않는 법인데, 우리는 압축성장도 모자라 죽음마저 압축적으로 처리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라는 박 대표는 종교시설·공공장소 등을 활용해 ‘마을 장례’ 또한 되살려보려 한다.
올 상반기 중 한두레는 혼인계도 시작한다. 결혼을 앞둔 조합원들이 계를 꾸려 비용을 모아가는 것은 기본. 이른바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3종 세트며 예단·혼수 따위에 휘둘리는 대신 ‘줏대 있는 결혼식’을 스스로 설계하게끔 도우려는 기획이다. “협동조합은 신뢰가 무너진 데서 생겨난다. 상조나 결혼이야말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진 시장이라 할 수 있다.” 한두레가 성공을 자신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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